오늘의 메뉴는 순살 반반 치킨. 50분 뒤 내 방 안에 찾아드는 고소한 기름의 향. 고독하고도 따뜻한 인생의 맛. 도대체 내가 왜 웃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시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치킨 한 마리를 해치우면 비로소, 내가 그토록 바라던 잠이 오기 시작한다. - 박상영,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한겨레출판사, 2020) 19쪽 중에서
박상영 소설가의 첫 에세이다. 센스 있는 표지부터 에피소드 하나하나 '박상영스럽다'라는 표현이 걸맞은 책이다. 솔직하고,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동시에 짠하고, 씁쓸하고, 서글프다. '야식 식이 증후군', '양극성 장애', '퇴사' 등의 현대인이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박상영 특유의 필력으로 거침없이 풀어낸다. 무겁고 깊은 주제를 이토록 재미있게 쓸 수 있다니 놀랍다. 훅 끌려들어 가 읽다 보면 어쩐지 위로를 받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 손에서 책을 내려놓기 어려웠던 이유다.
스무 개의 에피소드에는 그의 삶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직장 생활, 글쓰기, 여행, 가족, 야식 등 작가의 생활이 빼곡하다. 분명 읽고 있는데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음성 지원이 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이 오디오북으로도 출시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책을 소장하고 있는데도 오디오북이 듣고 싶다. 작가가 직접 녹음했다고 하니 얼마나 귀에 쏙쏙 들어올지는 상상하는 그대로일 테다. 일단 감탄은 접어두고, 에피소드 중 세 편만 꼽아 생각을 정리해봐야겠다. (단, 세 편이면 책의 매력이 충분히 드러날 거라고 확신한다.)
최저 시급 연대기
2019년 어느 날, 2만 원 상당의 쉑쉑버거를 먹으며 그간 생계를 지키며 살아온 날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2007년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호텔 아르바이트, 무작정 떠난 짧은 뉴욕 생활, 몇 번의 취업과 퇴사, 대학원 공부와 등단까지 십여 년 동안 개인 역사를 최저 시급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풀어놓고 있다. 작가의 20대 시절의 궤적을 좌르르 펼쳐놓았을 뿐인데, 2020년을 살아가는 많은 청년들이 공감할만한 현실의 쓰라림이 곳곳에서 밟혔다.
간신히 대학원을 수료했으나, 바로 등단을 하지는 못했다. 2016년, 나는 광화문에 있는 한 회사에서 최저 시급인 6030원을 조금 웃도는 봉급을 받으며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나을 게 없는 노동 환경이었으나, 이전보다는 한결 견디기 수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박상영,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한겨레출판사, 2020) 89쪽 중에서
이를테면 나 자신의 방식으로
왜 소설가가 되었냐는 물음에 가장 잘 답하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오래된 농담》, 《새의 선물》, 《외딴방》 등 작가가 탐독했던 한국 소설의 등장이 흥미로웠고, 지금은 등단해서 활동하고 있는 김세희 소설가와의 일화도 신기했다. 소설 쓰기의 매력에 빠진 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글에서 나 자신을 향한 글을 쓰게 되고, 마침내 등단하기까지의 과정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직업으로서 글쓰기의 고단함도 엿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작가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매년 여러 신인상이나 신춘문예, 인터넷 공모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수많은 신인이 쏟아지는데 그중에서 정식으로 책을 출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매 작품이 냉엄한 평가를 받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특히 나 같은 신인에게는 매 기회가 거의 마지막이나 다름이 없으며, 이 때문에 첫 책을 낼 때까지 거절은 감히 꿈꿀 수조차 없었다.
- 박상영,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한겨레출판사, 2020) 195쪽 중에서
하루가 또 하루를 살게 한다
용기가 생기게 하는 글을 좋아하는데 이 글이 특히 그랬던 것 같다. 남들의 눈에 멋진 인생 말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게 만드는 에피소드다. 소설가를 꿈꾸던 작가에게 등단이라는 큰 산을 넘은 뒤 찾아온 공허, 분노 등의 복합적인 감정. 어쨌든 털고 일어나 밥벌이를 하는 박상영 작가의 성실이 멋졌다. 정말 그렇다. 완벽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지만 오늘의 나를 잘 지켜내는 게 중요하다. "비록 오늘 밤 굶고 자는데 실패해도 말이다."(257쪽)
밥벌이는 참 더럽고 치사하지만, 인간에게, 모든 생명에게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생이라는 명제 앞에서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바위를 짊어진 시시포스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나는 이제 더 이상 거창한 꿈과 목표를, 희망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이 어떤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감각하고 있는 현실의 연속이라 여기기로 했다. 현실이 현실을 살게 하고, 하루가 또 하루를 버티게 만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