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문집은 평범한 날을 기리며 썼다. 빛나고 싶은 적 많았으나 빛나지 못한 순간들, 그 시간에 깃든 범상한 일들과 마음의 무늬를 관찰했다. 삶이 일 퍼센트의 찬란과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나는 구십구 퍼센트의 평범을 사랑하기로 했다. 작은 신비가 숨어 있는 아무 날이 내 것이란 것을, 모과가 알려주었다. 내 평생은 모월모일의 모과란 것을. - 박연준 『모월모일』(문학동네, 2020)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앓게 만드는 와중에도 봄은 왔고, 벚꽃은 피고 지었다. 봄의 시작에 받은 선물이다. 꽃망울이 터지듯 마음을 활짝 피게 만든 책이었다. 지난해 채널 예스에 박연준 시인의 산문이 연재되었다. 담담하고, 따듯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반해 꾸준히 필사했던 글이었다. 이 글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니, 반갑고 반가운 마음에 책을 여러 번 쓰다듬었다. 표지의 감촉은 편안함을 주었다.
책의 첫 장에는 좋아서 슬퍼지는 짧은 편지가 적혀 있었다. "내 쪽으로 처음부터 옮겨 심고 싶었고, 그래서 이제는 뿌리를 아주 깊게 내려 버려서 나는 그 나무 없이는 지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 언제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자" 이 책 한 권으로 올해 봄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아끼고 싶은 마음에 벚꽃이 비가 되어 내릴 때까지 품고 읽었다.
겨울부터 시작해 가을까지 계절에 맞는 산문이 담겨 있다. 사계절로 묶여 있는 목차를 만날 때면 계절을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각각 아름다움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그 아름다움을 시인만의 언어로 그려놓은 수채화에 마음까지 맑아진다. 계절별로 몇 개의 문장을 데려와 옮겨두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이 책을 펼치고 싶어 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봄이 속도를 내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모월모일을 품게 되길 바라며 기꺼운 마음으로 써 내려가야겠다.
겨울 고양이
겨울의 이야기다. 밤과 슬픔, 개와 고양이 등등. 겨울이라는 계절 위에 살포시 놓여 있는 이야기들은 모닥불 같은 온기를 지녔다. 그중 「스무 살 때 만난 택시 기사」라는 산문은 몇 개의 장작을 더 넣은 듯 따듯했다. 술에 취해 창밖의 한강을 바라보며 우는 어린 시인과 무심한 듯 다정하게 달래는 택시 기사 아저씨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평범함 속에서 특별해지는 순간의 공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데 그가 별안간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돈은 됐으니 앞으로는 울지 말고 다녀요, 나를 다독이던 그의 말. 그 다정함에 감명받아 나는 또 울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가는데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폭포처럼 흐르던 시절이다.
- 박연준, 『모월모일』(문학동네, 2020) 47쪽 중에서
하루치 봄
봄을 여는 첫 번째 이야기 사월부터 천천히 스미듯 물들었다. 꽃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꽃나무들이 "놀이동산 조명이 차례로 켜지듯 남쪽으로부터 시작해 '팟''팟''팟', 순서대로 피어난다"라니. 퇴근길 낮이 밤으로 옷을 갈아입는 찰나에 가로등이 '탁'하고 켜지는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오늘의 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만드는 문장들이었다.
봄이에요. 사월이고요. 단 하루도 슬프게 지내지 않을 거예요. 나무를 실컷 보겠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린잎을 '어린잎'으로 보내는 때는 짧아요. 금세 지나가죠. 가끔 사람도 한 그루, 두 그루 세고 싶어요. 내 쪽으로 옮겨 심고 싶은 사람을 발견한다면······ 흙처럼 붉은 마음을 준비하겠어요.
- 박연준, 『모월모일』(문학동네, 2020) 61쪽 중에서
여 름 비
무더위에 지쳐서 여름이 주는 기쁨을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여름의 좋은 점을 손에 꼽기 어려웠다. 뜨겁고, 습한 느낌이 별로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물놀이하며 짓는 싱그러운 웃음이 덕분에 여름이 아주 조금 괜찮아졌을 뿐이다. 여름의 이야기가 담긴 산문을 읽으며 알았다.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지 여름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 도처에 있었다. 어쩐지 올해는 봄과의 작별이 덜 아쉬울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여름을 사랑한다! 까슬까슬한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자다, 잠깐 뒤척이기도 하는 여름밤의 선잠이 좋다. 맹렬하게 우는 풀벌레 소리가 좋다. 한낮에 정수리가 녹을 것 같은 기분, 따가운 빛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좋다. 살균되는 기분이랄까. (···) 잘라놓은 수박을 선풍기 앞에서 먹어치우고, 자두 두 개로 입가심을 하는 맛이란!
- 박연준, 『모월모일』(문학동네, 2020) 114~115쪽 중에서
오래된 가을
시인은 가을이 오면 눈을 꼭 감고 지나가는 버릇이 있어 가을에 대한 글이 많지 않다고 했다. 가을은 쓸쓸하고 아파서 산문보다는 시로 쓰는 것은 아닐까, 짐작했다. 오래된 가을이라는 챕터에는 쓸쓸함과 공허함이 느껴지는 글이 많았는데, 나는 이런 문장들 사이에서 오래 머물렀다. 고독함 속에서 사유하지 않는다면 살아낼 용기도 생기지 않으니까. 이 책이 겨울에서 시작해 가을로 끝나는 이유를 생각한다. 그렇다. 웅크리는 시간이 있어야 다시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다.
기러기들이 하늘을 나는 풍경에는 이런 것이 들어 있다. 생의 리듬, 나아가는 일밖에 도리 없음, 앞 옆 뒤를 이루는 수많은 당신, 그 안에서 길어지는 내 그림자, 날갯짓의 하염없음, 도착의 유예, 알 수 없는 나날, 예외 없이 가야 하는 시간, 시간의 피로, 가망과 가망 없음, 그 속에 깃든 두려움, 믿으면서 포기하기, 포기하면서 일어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