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태어나서 삶을 살다 보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마주치게 된다. 2020년, 코로나19라는 감염병으로 인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듯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거센 파도가 밀려오면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생이다. 『미생』(위즈덤하우스, 2013)으로 잘 알려진 만화가 윤태호가 재해석해서 그린 『사일구』(창비, 2020)라는 만화에는 살아있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1936년생 김현용이 등장한다. 죽음 이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지금의 시대와 묘하게 맞물리는 지점이 서글프다.
"1936년생으로 일제강점기에 세상에 나와 의미도 모르는 해방을 맞이하고 의미도 모르는 갈등과 반목을 목격하다 지옥과도 같은 한국전쟁을 경험한다."(12~13쪽) 어떤 의미를 이해할 겨를도 없이 벌어져 버린 사건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애쓰는 하루하루가 처절하다."그저 곯은 배를 무엇으로 채울지가 목전의 문제였으므로 구황(救荒)의 처치가 하루의 전부였을 것이다."(33쪽) 이제 여든이 넘은 김현용이 걱정, 우려, 심려 속에서 눈을 감아야 했던 이유는 그가 살아낸 인생 속에 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 그가 평생 원했던 '안정'이라는 종착지, 그 끈질긴 갈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어린 소년 김현용은 한국 전쟁에 참전해 총상을 입고 다리를 절며 집으로 돌아온다. 혼란한 사회 틈에서 벌어지는 일에 눈 감고, 귀 막으며 이 악물고 공부해 대학생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에서 자행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동생 현석과 친구 석민을 이해하지 못했다. 겁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전쟁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또다시 위험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소중한 이들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불길한 예감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1960년 4월 19일 반독재 민주주의에 항거하는 총궐기에서 친구 석민의 죽음을 목격한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 동생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면서도 그들의 희생이 지닌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윤태호 작가는 실제로 4·19 혁명을 겪은 장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작업했다고 한다. 이념이 대립하는 혼동의 역사 한가운데서 정의를 외치지 못했던 자의 고백은 가슴 깊이 뜨거운 울림을 준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실린 임유경 교수의 작품 해설은 만화를 보다 견고하게 만든다."주인공의 삶을 통해 식민과 해방, 전쟁과 분단, 그리고 4·19 혁명이 하나의 공통된 감각을 낳았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 감각이란 바로 '살아남는 일'에 대한 것이다."(200쪽)섬세한 그림과 흡인력 있는 스토리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다. 끝으로 실제 4·19 혁명에 참여해 희생된 고 진영숙(한성여중 2학년)양이 쓴 편지의일부를 옮긴다. 아이들이 자라면 책을 눈에 잘 띄는 곳에 꽂아둬야지. 이는 어제의 이야기가 내일의 희망이 되길바라는 마음 같은 것이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와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