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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May 09. 2020

아름다운 시, 아름다운 평론

[오늘, 책]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_이원하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 중에서   



수많은 책들 중 내 취향에 맞는 책을 고르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책이 책을 연결해주는 경우가 가장 많고, 독서 팟캐스트의 추천 도서를 읽기도 한다. 최근에는 동네 책방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서점 베스트셀러를 눈여겨보곤 했는데, 이 시집은 당인리 책발전소의 베스트셀러로 올라와 있는 책이었다. 제목만 보고는 에세이라고 생각했다. 검색해보니 시집이었다.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원하 시인의 첫 책이었다. 누군가의 첫 책을 만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기쁜 마음으로 주문했다.


흰색과 보라색이 적당히 섞인 포근한 색감의 시집이었다. 책장을 차르륵 넘겼는데, 세상에 신형철 평론가의 평론이 실려 있었다. 평론을 읽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느꼈던 게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었다.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니 감사한 마음에 평론부터 읽기 시작했다. 시들이 가진 아름다움을 그만큼 아름다운 평론으로 풀어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절묘한 해석과 깊이 있는 글 속에서 이원하 시인의 시들이 편안하게 숨 쉬고 있었다. 그의 평론 속에서 인용되고 있는 시는 얼마나 안심이 될지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평론을 선물 받은 시인이 얼마나 감격스러울지 생각하면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이제 울지 않기 위해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을 수 있어서 웃는 사람이 되었다. 이 웃음은 그가 쟁취해낸 것이지만 그는 이것이 제주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자, 그러니 시집 전체가 아니라 이 시만 읽은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 어떤 마음의 역사가 이 시를 쓰게 하였는지를. 이 웃음 뒤에 어떤 세월이 있으며, 이 아름다운 경어체가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를. 시집은 여기서 끝나고 그는 계속 가야 할 길이 있다. 자연에서 자유로 가는 길, 우리도 그 길 위에 있고, 시는 오로지 그 길 위에만 있다. 이원하의 시는 자유를 바라보는 자연의 노래다. 

- 신형철, 「자연에서 자유까지」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


평론을 통해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알았으니, 본격적으로 시를 읽어볼 차례다. 보라색 표지를 열고, 목차를 읽는다. 정갈하고, 순한 언어들에 머리가  맑아진다. 책을 눈으로 가만히 읽다가 나도 모르게 읊조릴 때가 있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인데 연필이 없을 때, 자연스럽게 낭독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눈으로 밑줄을 긋는 행위랄까? 시집은 가방에 두고 다니며 짬짬이 펼쳐 읽었는데 묵독보다 낭독을 훨씬 많이 했다. 그건 아마도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이 많아서일 테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이 그랬다.


눈이 쌓이는 만큼 빛은 자기를 최대한 펼쳐놓아요
펼쳐서 얻는 게 별로 없을 텐데도
사람 좋은 사람처럼 자신을 바닥에 널어놓아요
저렇게 물도 들지 못하고 웃으며 사는 것 좀 보세요  

- 이원하, 「참고 있느라 물도 들지 못하고 웃고만 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 부분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한 번의 발걸음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 이원하,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 부분


영원히, 말고
잠깐 머무는 것에 대해 생각해
전화가 오면 수화기에 대고
좋은 사람이랑 같이 있다고 자랑해
그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자랑해

- 이원하, 「환기를 시킬수록 쌓이는 것들에 대하여」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2020) 부분





마지막 詩 「꿈결에 기초를 둔 물결은 나를 대신해서 웃는다」를 읽고, 책장을 덮었다. 독자로서 시인의 걸음을 따라가고 싶어졌다. 이원하 시인의 책들이 책장을 채우는 순간순간이 행복해질 것 같은 기분이다. 시를 모두 읽고, 다시 한번 평론을 읽는다. 적확하고, 아름다운 평론은 읽을수록 빛난다.


<글머리 사진> © 오기오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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