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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May 13. 2020

적막한 어둠을 견디게 하는 촛불 같은 힘

[오늘, 책] 단순한 진심_조해진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을 저의, 진심입니다.

- 조해진, 『단순한 진심』(민음사, 2019)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김영하 작가님의 표현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 권의 책을 완독 하지 못하면 다음 책으로 넘어가지 못했던 예전과 달리 읽을 책이 쌓여있어도 다시 책을 산다. 물론 재정적인 곤란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장품이나 옷 등의 소비를 줄이는 것으로 지금의 패턴을 지켜내는 중이다. 조해진 작가의 『단순한 진심』(민음사, 2019)은 지난겨울에 데려온 책이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책장에 꽂아두고 선뜻 손에 들지 못했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이라면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끝까지 단숨에 읽고 싶어 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직장에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책을 한 호흡으로 읽어낼 수 있는 여유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책장을 지나갈 때마다 눈에 밝히던 이 책을 지난 주말에 드디어 꺼내 읽었다. 적당히 나눠 읽으려는 마음이었지만, 한번 펼친 책은 덮을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은 넷플릭스의 보살핌(?)을 받았다.


소설책의 표지를 쓰다듬으면 손수건의 감촉이 느껴진다. 책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은 실로 수놓은 듯한 질감이 굉장히 독특하다. 이런 감각적인 표지는 처음이었는데, 정말 좋았다. 책을 보는 내내 표지에 박힌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만지작거리며 읽었다. 소설의 화자는 이제 막 40대가 된 프랑스 입양인 '나나', 연극배우이자 극작가로 일하는 여성이다. 뱃속에는 9주 차에 접어든 아기 '우주'를 품고 있다. 엄마가 된 순간부터 생모를 찾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던 그는 한국의 영화감독 서영이 보낸 이메일을 거절하지 못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나나 씨가 프랑스로 입양되기 전까지 한국에서 머물렀던 공간들과 그곳을 접촉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다가, 최종적으로는 나나 씨의 오래전 이름인 '문주'의 의미를 알아내는 과정 자체가 지금 제가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 조해진, 『단순한 진심』(민음사, 2019) 12쪽 중에서



상업 영화를 찍어본 적이 없는 아마추어 감독 서영, 스태프는 단 두 명뿐이다. 서영의 남자친구 은과 학교 후배 소율. 이들과 작업하며 나나는 그의 오래전 이름 '문주'라고 불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부모에게 버려진 서너 살가량의 아이가 청량리역 기찻길에서 기관사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 기관사는 아이를 어머니와 살고 있는 집에 데려가 문주라고 부르며 일 년 남짓 돌보다가 고아원으로 보낸다. 이후 아이는 프랑스로 입양되었고, 바로 그 아이가 지금의 나나이다. 입양인 나나의 삶에서 '문주'라는 이름의 의미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가끔은 친구들이 과거의 일시적인 이름에 왜 그토록 집착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 질문에 나는 언제나 같은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문주는 내게 시원(始原)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문주로 불리기 이전, 그러니까 철로에서 발견되기 전까지의 삶은 암흑의 연장일 뿐이어서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전무했다.

 - 조해진, 『단순한 진심』(민음사, 2019) 22쪽 중에서



영화 촬영 동안 문주는 용산구 이태원동, 해방촌이라고 불리는 서영의 자취방에서 지내게 된다. 건물 1층에는 70대 노인이 운영하는 복희 식당이 있고, 3층이 문주가 머무는 공간이었다. 복희라고 불리는 1층 노인에게는 돌보던 아이를 벨기에로 입양 보낸 아픔이 있었다. 노인은 문주의 등장에 생기를 찾고, 문주 역시 노인의 정성에 마음을 녹인다. 한 컷 한 컷 촬영이 진행되며 문주의 이야기가 밝혀지는 동시에 노인의 과거도 조금씩 드러난다. 기지촌, 미혼모, 입양 등 가슴 아픈 사연들 속에서 슬픔을 따듯하게 만드는 돌봄의 마음이 흐르고 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 뭐든지, 다, 에브리, 에브리, 알았지?"

뭐든지, 다, 에브리, 에브리······. 럭키하고 또 럭키한 그녀가 선택한 단어들에는 체온이 있었고, 그제야 나는 내가 고향에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 조해진, 『단순한 진심』(민음사, 2019) 72~73쪽 중에서



한 인터뷰에서 조해진 작가는 이 책에 대해 "역사 속에 버려진 생명을 포함해 모든 생명은 귀하다고 생각한다. 탄생과 죽음을 아우르는 생명에 바치는 헌사"라고 말했다. 생명에 대한 환대와 타인과의 유대를 떠올리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게 하는 소설이다.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 『아무도 보지 못한 숲』(민음사, 2013)에 이어 『단순한 진심』을 읽으며 알았다. 조해진 작가가 만드는 세계는 적막한 어둠을 견디게 하는 촛불 같은 힘이 있음을.


조해진은 진심이라는 관념의 공간을 느리게 거닐면서 그 지명에 담긴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힌다. 우리 모두의 이름은 언젠가 한 존재가 타인을 위해 진심을 담아 최초로 건넨 말이라는 것을.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인간이 타인을 껴안는 첫 번째 방법임을.
- 김현(시인) 「내 이름은」 (조해진, 『단순한 진심』, 민음사, 201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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