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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May 16. 2020

고마운 마음이 서평으로 전해지기를

[오늘, 책] 앤셔어리의 글 라디오_앤셔어리

내게 글쓰기는 월동준비다. 일상 속 스치는 감정을 한 올 한 올 문장으로 엮는다.
-앤셔어리, 『앤셔어리의 글 라디오』(조그만 북스, 2020)



작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를 바라본다. 목소리의 떨림, 음악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천천히 나에게 스밀 때 그와 나 사이에 공기가 특별해진다. 앤셔어리 작가의 책을 읽고 있으면 유독 그런 기분이 든다. 『앤셔어리 산문집』(조그만 북스, 2019)에 이어 두 번째 책 『앤셔어리의 글 라디오』(조그만 북스, 2020)를 만났다. 역시 독립출판물이다. 찬찬히 어루만진 문장마다 작가 특유의 따듯한 시선이 살포시 더해진다. 한 편 한 편 다정한 글이 노래를 품고 도착했다.


표지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글을 쓰고 있는 작가가 상상된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빙그레 웃음이 난다. "어쩌다 보니 중년. 음악과 유독 친하고 걷기와 책 그리고 커피를 애틋하게 여김" 책날개에 쓰인 작가 소개를 읽으면 표지가 떠오른다. 이어지는 목차는 구성이 탄탄하다. 오프닝 멘트를 시작해 1부 AM 낮, 2부 PM 밤, 3부 FM 심야, 4부 ME 자정 그리고 클로징 멘트가 담겨 있다. 스무 편이 남는 산문들이 책을 채우고 있다.




1부 AM 낮


글쓰기, 서점, 노래, 라테··· 작가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이다. 김영하 소설가의 말이 떠올랐다. "어떤 순간 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에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작가가 선곡한 노래를 플레이하고 읽으면 책의 매력이 극대화된다. 독립서점에서의 즐거움을 표현한 문장에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하는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에 그랬다.


한 권의 책을 골라 들고 겉표지를 쓰다듬고 책을 열어 아무 부분을 펼친다. 속내 지의 부드러운 종이 질감을 살짝 만지고 책 냄새를 맡는다. 그다음 목차 작가소개 끌리는 부분을 찾아 글을 읽어 본다. 이런 나만의 루틴. 일련의 과정들을 차례로 즐기는 점이 독립서점 가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이다.

- 앤셔어리 『앤셔어리의 글 라디오』(조그만 북스, 2020) 26쪽 중에서     




2부 PM 밤


멕시코 쿠바에서 겪은 일화, 석남사에서 들었던 생각 등을 글로 풀어내고 있다. 경험을 자연스럽게 글로 표현하고, 자신이 품었던 생각을 돌이키며 일상에 균형을 잡아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글쓰기와 삶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이야기들이 편안하게 읽혔다. 작가가 소개해 준 어반자카파의 '거꾸로 걷는다'를 들으며 생각한다. 나 또한 하루하루를 단단하게 만들고 싶다고.


마침내 찬바람이 에리는 겨울이 찾아오면 그간 부지런히 쓰고 짠 스웨터를 입을 것이다. 몸이 시리면 외투를 걸치고 가슴이 휑할 땐 따뜻한 글 실로 짠 글쓰기 스웨터를 입어 온기를 감싸 안고 싶다. 그랬다. 우린 단풍 구경을 목전에 두고 실은 월동준비를 하러 석남사에 왔다. 물론 석남사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 앤셔어리 『앤셔어리의 글 라디오』(조그만 북스, 2020) 37쪽 중에서  




3부 FM 심야


늦은 밤이다. 작가가 추천한 노래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책을 읽으며 학창 시절을 떠올린다. 마음이 어지러웠던 숱한 밤, 라디오에서 위안을 느끼던 내 방으로 돌아간 듯하다. 첸의 '우리 어떻게 할까요'라는 곡을 들으며, 식물원 근처 주택에 사는 작가가 가을 햇살에 대추를 말리는 모습을 그려본다. 잣이 동동 떠있는 수제 대추차를 마시게 된다면 속이 따스하게 데워질 것 같다.


가을 햇살에 나날이 쪼그라들어 달콤하고 진하게 내려진 대추차가 커밍쑨이다. 넉넉지 않은 양과 부지런히 널고 걷는 손품이 매일 가미된 희소가치가 상종가다. 아무리 소담스럽게 앉아 있는 대추차라 한들 화룡점정 역할을 맡은 두 서넛의 고운 잣이 없다면 유보당한다. 이참에 수제 대추차 위로 둥둥 띄워질 그리운 잣 같은 얼굴들을 셌다.

 - 앤셔어리 『앤셔어리의 글 라디오』(조그만 북스, 2020) 67쪽 중에서




4부 ME 자정


마지막 챕터에는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는 작가의 진심이 충실하게 담겨 있다. 왼쪽 팔의 화상 흉터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써낸다. 무엇보다 글쓰기를 향한 정성이 곳곳에 배어 있는데, 특히 '책으로 달에 도달하는 법'이란 산문에서 작가가 자신의 글쓰기를 돌아보며 써낸 문장이 좋았다. 몸의 성장은 이미 멈췄고 이제 나이 듦으로 향하는 시간이지만,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생겼다. 이 고마운 마음이 서평으로 전해지기를 바란다.


글 그릇이 커졌다. 정성을 행한 끝에 과거에 비해 매일 쓰고 많이 써도 소화가 잘 된다. 그리고 가장 고무적인 일은 글과 백지를 미장센으로 삼고 써 내려가도 두렵지 않다는 점이다. 유별을 떨지 않고도 일단 써진다.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든다.

- 앤셔어리 『앤셔어리의 글 라디오』(조그만 북스, 2020) 102쪽 중에서

<글머리 사진> ⓒ alexb,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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