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딸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할머니의 인내심은 대단해

by 기꺼움


서율아!


오늘 아침 실내화를 두고 갔다는 문자를 받고 아차 했어. 아빠가 해결해주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 맨발로 다닐뻔했잖아. 양말도 안 신고 갔는데.




엄마도 어릴 적에 자주 그랬어. 학용품을 잃어버리는 건 예사였고, 집에 두고 간 포스터 그리기 숙제를 교실 사물함 위에 살짝 올려두고 가시던 할머니 모습은 아직도 기억나. 하루는 학교가 끝나고 널뛰기를 하며 놀다가 벤치에 잠바를 벗어두고 와서 할머니랑 다시 찾으러 간 적도 있어.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보라색 가을 잠바였는데, 결국 못 찾았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할머니의 인내심은 대단해. 한 번도 혼난 적이 없었거든. 엄마도 그런 일로 너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아(꽤 참을성을 요하는 일이지만). 어른이 돼보니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지 않고 챙겨야 할 일들이 정말 많더라. 어릴 땐 괜찮아.


서율아 요즘 엄마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까, 고민을 많이 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쓸 게 업다 싶으면, 신기하게도 너희가 엄마에게 글감을 줘. 정말 고마워. 매일 쓰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오늘은 실내화 덕분에 편지를 완성했네. 집에 두고 간 숙제를 교실까지 가져다주던 할머니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 행복했어.




참, 어젯밤에 아빠가 "소리 지르는 딸은 아빠 딸이 아닌 것 같아.", "병원에서 바뀐 건 아닌지 확인해봐야겠어."라며 율이를 놀렸잖아.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 "나 엄마 딸 아니야?" 심각한 얼굴로 물어보는 네가 귀여웠어. 우리 딸 아직 아기네, 싶더라.


서율아 걱정하지 마. 너는 덜렁거리는 엄마를 꼭 닮은 엄마 딸이야.


2019년 뜨거운 여름을 통과하며 아이들에게 매일 쓴 편지를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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