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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Sep 04. 2020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상

[오늘, 책] 내가 말하고 있잖아_정용준



누구도 좋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소년의 눈에 비친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상



| 재정의



정용준 소설가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를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문학 계간지를 통해 읽었던 그의 몇몇 작품들은 매번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에서 흐르는 분위기 자체가 압도적이었다. 몰입이 잘 되는 글이었지만 단행본을 찾아 읽지 못했다. 공포 영화를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던 것 같다. 그런 이야기 안에서 견디기 힘든 나를 잘 아니까.


그렇게 이름만 기억하고 있던 정용준을 세계의 호수(2019, 아르테)라는 소설의 오디오북으로 다시 만났다. 이별이란 감정을 세밀하고, 잔잔하게 풀어낸 이야기였다. 짧은 소설은 긴 여운을 남겼고, 소설가 정용준을 재정의하게 했다. 그의 작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덕분에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새로운 소설이 나왔을 때는 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 상처



내가 말하고 있잖아(민음사, 2020)는 '말'에 대한 이야기다. 말 더듬 버릇을 고치기 위해 언어 교정원에 다니게 된 열네 살 소년이 화자이다. 잘해 주면 사랑에 빠져버렸던 소년은 친절한 사람들에게 받았던 상처가 쌓이며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내 편은 아무도 없으며, 속지 않겠다고, 잘해주는 사람을 미워하겠다고 일기에 쓴다. 그렇게 아이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열네 살이 되었다.


처음 언어 교정원에 가게 된 날, 원장의 다정한 목소리와 태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을 더듬는 교정원 사람들의 환대에도 소년은 정신을 바짝 차린다. 현혹되면 안 된다고, 그들을 좋아하게 되면 안 된다고 자꾸만 끌려가는 마음을 뒤로, 뒤로 붙잡는다. 더는 상처 받고 싶지 않은 작은 아이의 버둥거림이 슬펐다. 


하늘 끝까지 헹가래질하다가 마지막에 받아 주지 않을 거잖아. 웃게 만든 다음 울게 만들 거잖아. 줬다가 뺏을 거잖아. 내일이면 모른 척할 거잖아. 이해하는 척하면서 정작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잖아. 말뿐이잖아. 결국 그렇잖아. 그러니까 당하면 안 된다. 그땐 진짜 끝나는 거야. 끝. (21-22쪽)




| 눈빛



언어 교정원에서는 모두 이름표를 달고 있다. 소년은 '무연'이었다가 '엄마'였다가 '우주'가 된다. 원장은 각자가 말하기 어려운 단어로 별명을 지어주고, 모두가 그 이름으로 한 달을 산다. '루트', '마야코프스키', '핑퐁', '모티프' 등 입으로 쉽게 꺼내지 못하는 단어로 불리면서 그 단어와 친숙해질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말과 어긋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소년은 부서진 마음을 회복해간다.


또래였던 '루트', '곰곰이'와 고민을 나누고, 다정한 눈빛의 '처방전'과 '할머니'에게 위로를 받는다. 의사인 '처방전'은 이모라 부르며 따르는 소년을 진심으로 대해준다. 할머니(별명이 아닌 진짜 할머니로 치매를 앓고 있다)는 소년을 아들로 여기며 계피맛 사탕을 쥐어준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을 가진 이들 덕분에 얼어붙었던 소년의 마음이 서서히 녹는다.


이모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무엇보다 나를 예뻐해 줬다. 화가 난 표정과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구별해 냈고 용기가 없는 마음에 용기를 주고 힘이 없는 몸에 힘을 넣어 줬다.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는 거,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거, 손잡아 주고 오늘처럼 돈가스를 사 주는 거, 다 좋다. (46쪽)




| 연대 그리고



소년에게는 끔찍한 사람이 있다. 말을 더듬는 것을 고쳐야 한다는 이유로 수업 시간에 세워두고 책을 소리 내어 읽게 하는 국어 선생님, 자기만큼 사랑에 쉽게 빠지는, 심지어 때리는 사람도 사랑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애인. 언어 교정원의 친구들은 복수해주겠다며 함께 머리를 맞대고, 원장을 비롯해 교정원의 식구들은 소년에게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를 변호하고, 보듬는다.


서로를 안아주는 마음들이 책 안에서 숨 쉬면서 그것을 읽는 독자까지 끌어안는다. 비단 말이 아닐지라도 누구에게나 결핍과 슬픔이 있으니까. 그런 것들이 소설을 통해 치유된다. 독자를 소설 안으로 불러들이는 정용준 작가의 솜씨가 탁월하다. 언젠가 그가 만들어 낸 어두운 세계로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책이 출간된 이후 출연한 팟캐스트(책읽아웃)에서 정용준은 소설의 많은 부분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했다. 어린 시절 말을 더듬었던, 여전히 '더듬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말을 더듬는 본인의 이야기라고. 소설 끝에 이어지는 작가의 말이 어른이 된 소년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던 이유다.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으면
밤은 가고 해가 뜬다.
또 하나의 진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운 긴긴긴긴 밤
톡톡, 스페이스바를 누르고
탁, 엔터를 치면
계속 쓸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진실.
꾸며내고 지어내고 바꾼 기억들.
감정, 얼굴, 이름, 일기, 날과 달과 시간과 공간, 그리고 단어들.
진짜 기억이 되고 감정이 되고 얼굴이 되고 이름이 되어
살아 움직였어.
가짜가 아니었어. 뻥이 아니었다고.



-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민음사, 2020)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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