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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Jun 20. 2020

무지개를 마주하는 순간

[오늘, 책] 여름을 지나가다_조해진


| 마음이 근질근질



읽지 않은 소설책을 보고 있으면 기차표를 예매해둔 기분이 든다. 어디론가 떠나게 될 거라는 기대감에 설렌다. 읽은 소설책을 만지고 있으면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는듯하다. 그곳의 풍경이, 사람이 그리워진다. 여행을 가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친구의 마음을 책을 읽으며 떠올린다. 한동안 소설을 읽지 않으면 마음이 근질근질해지니까.



© JK_Unsplash



| 서평의 기쁨



조해진 소설가를 좋아한다. 몇 번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좋다. 그가 만든 세계는 지독하게 외로우면서도 묘하게 아늑하다. 처음으로 책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조해진 작가의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를 읽고 나서였다. 지인과 산책하며 소설에 대해 쉼 없이 떠든 뒤에도 책을 읽은 감흥이 자꾸만 넘쳐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서평을 쓰고 나서야 책이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왔음을 감각했다.(그 기쁨을 알기에 여전히 쓰고 있다.)



© Toa Heftiba_Unsplash



| 여름을 지나가다



이번에 펼친 소설은 조해진 작가의 2015년 작품인 여름을 지나가다(민음사, 2020)이다. 민음사에서 오늘의 작가 총서 33으로 재출간되면서 읽게 되었다. 여름의 길목에서 조해진 작가의 소설을 다시 읽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휩쓸려 당도한 곳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주는 인물들이 애처롭다. 목수인 아버지의 가구점 사업 실패로 신용불량자가 된 '수호', 회사의 안위를 위해 약혼자를 수렁으로 내몰게 된 '민', 조만간 사라질 쇼핑센터 옥상 놀이공원에서 일하는 '연주'까지. 소설의 목차는 6월, 7월, 8월을 지나가 여름의 끝에 닿는다.



'여름'은 기댈 곳이 없는 청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가장 에너지가 넘치지만 열매는 아직 얻을 수 없는 저마다의 여름을 지나가는 청춘들에게 이 소설을 안부 인사처럼 전하고 싶었던 작은 바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밀도로 진심입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무지개를 마주하는 순간



수호와 민은 철저한 타인이지만 둘이 교차하게 되는 공간이 있다. 폐업한 가구점이 그렇다. 수호에게는 아버지의 사업장이고 민에게는 갓 취업한 중개사무소의 매물이다. 목수의 손길이 담긴 이곳은 두 주인공에게 잠깐의 안식을 주는 장소이다. 삶의 에너지가 바닥난 수호가 가구점에서 머무르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 생기게 된다. 신열이 나는 수호를 보살피는 민, 바라는 게 없는 투명한 돌봄이 내내 다행스럽다. 가구점 쇼윈도에 빛이 들어오면 무지개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둔 '무지갯빛 셀로판지'. 무지개를 마주하는 순간이 애틋하다.


수호의 머릿속은 저 무지개를 어딘가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종이컵 여자가 오면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대기의 수분과 햇빛의 양과는 상관없는, 그저 색색의 셀로판지를 투과한 가짜 무지개에 불과했지만 여자는 충분히 기뻐할 것이고 견뎌야 했던 무언가를 잠시라도 잊을지 몰랐다. (174쪽)



| 바라건대 부디 무탈하기를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우리의 여름 또한 어쩔 수 없음을 견디고 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일상의 균열은 각자의 자리에서 크고 작은 부침을 겪게 만든다. 이 와중에 전국에 있는 의료진들은 오죽할까. 과로에 시달리며 우울증의 위협까지 받는 상황이라고 한다. 어느 기사에 실린 의료진의 인터뷰를 읽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죽음의 공포를 여러 차례 느꼈어요. 도망치고 싶은데 환자를 두고 갈 수 없으니까." 민이 수호에게 그랬듯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투명한 돌봄의 손길이 빛난다. 마치 무지개처럼.



바라건대 부디 무탈하게 지나가기를.



© 기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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