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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Jun 17. 2020

별빛 같은 찰나를 건져 올리다

[오늘, 책]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_재수


# 다이어리를 펼쳐 바람에 대해 적었다



할 일 없이 누워서 책을 읽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서 TV 채널을 돌리고, 배가 고프면 내 한 끼만 차려 먹으면 되는 그런 주말은 엄마가 된 뒤 사라졌다. 애들이 조금 더 크면 가능하려나? 어쨌든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엄마 노릇 중에도 짬짬이 책을 읽을 여유가 생긴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지난 일요일 저녁, 아이들은 욕조에 물을 받아 놀고 있는 사이 식탁에 앉아 책을 읽는데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비 온 뒤 투명해진 공기를 한껏 머금은 산뜻하고 시원한 바람이었다. 다이어리를 펼쳐 바람에 대해 적었다. 찰나를 간직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SNS에 올린 우리 부부의 일상 만화에 달린 어떤 댓글을 한참 바라봤다. 항상 사이가 좋고 행복해 보이는데 그 비결이 뭔지 묻는 내용이었다. 나는 답글을 남겼다.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는데 되도록 좋은 기억만 그림으로 남겨서 전체적인 기억을 좋은 쪽으로 왜곡하는 거라고. (326쪽)



© Vidar Nordli-Mathisen_Unsplash




# 일상의 찰나를 건져 올린 빛나는 이야기를 만나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 스물네 시간 행복한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그저 즐거운 순간을 포착하며 살아가는 게 삶이라고 자주 곱씹는 편이다. 얼마 전 읽은 재수 만화가의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심플라이프, 2020)는 그런 일상의 찰나를 건져 올린 빛나는 이야기였다. 아내를 처음 만나고, 결혼을 하고, 길에서 구조한 고양이들과 식구가 되는 과정을 유쾌하게 담고 있다. 무엇보다 만화와 에세이의 적절한 조합은 책을 손에 든 내내 완벽한 기쁨을 주었다. "무료하고 답답한 일상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청량감과 충만함을 선사할 것이다."라고 쓰인 출판사 서평이 찰떡같은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내는 집에서 기분이 좋으면 처음 듣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거나 처음 보는 이상한 춤을 추거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열광했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면 바로 멈춘다. 그렇게 하면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그냥 조용히 옆눈으로 흘끔거리며 속으로만 열광한다. 한번 더 해달라고 떼를 써도 소용이 없다. 다행히도 아내의 그 이상한 노래와 춤을 조금 더 오래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같이 하는 것이다. 더 열정적으로. (149쪽)



# 캐릭터가 주는 매력에 흠뻑 빠지다



재수 만화가와 그의 아내(대장님), 세 마리 고양이의 캐릭터가 생생하다. 책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서 '어이~'하고 어깨를 툭툭 친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뭐, 살짝 놀랄 수는 있겠지만) 이런 부분에서 작가의 공력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타고난 재능에 오랜 성실이 더해진 결과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 작가는 수년 전부터 SNS를 연습장 삼아 꾸준히 그림과 단상을 올려왔는데 현재는 팔로워가 50만 명에 달한다. 많은 이들이 호응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캐릭터에 생명력을 주고, 치명적인 매력까지 갖게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아내는 대부분의 상황을 리드했고 나는 리드당하는 것에 든든함을 느껴왔던 것 같다. 종종 장난삼아 "나 버릇 잘못 들면 어쩌려고 혼자 이렇게 다 해버리는 거야?"라고 물어보면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나 없이 못 살게 만드는 중이야." (118쪽)



© 기꺼움



#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서로의 성향과 습관, 식성까지 낱낱이 알게 되는 게 가족이다. 나는 남편을 위해 화장실 슬리퍼에 물기가 빠지도록 세워두고, 남편은 나를 위해 조도가 낮은 불을 켠다. 사소한 부분까지 맞춰가며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식구(자녀든 반려동물이든)가 생길 때마다 같은 방식으로 마음과 자리를 내어주었다. 익숙하게 지내다가도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달라졌음을 새삼 느낄 때가 있다. 어쩌면 재수 작가도 자신의 곁에 아내가 있고, 고양이 세 마리가 있음을 유독 실감했던 순간에 그리고, 쓰지 않았을까?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라고 생각하며.



© 기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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