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는 삶의 단면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강한 태풍이 지나가는 날에도 개인의 생은 무심히흘러간다. 특별할 게 없어서 특별한 영화다. 영상을 보면서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이 드는 건 소설을 읽은 후에 영화를 봤기 때문일까?
단 한 번의 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15년 동안 글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료타는 사설탐정으로 일하고 있다. 취재 차원으로 일한 다지만,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잠드는 날이 먼지처럼 쌓여 수북하다. 아내 교코와는 이혼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아들 싱고를 만난다. 양육비는 몇 달째 밀려있고, 월세 조차 내가 힘든 상황이지만, 고객을 협박해 생긴 돈으로 경륜장에 가고, 아버지 유품을 전당포에 맡기기도 한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마음 같지 않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어느새 삶의 행로는 바뀌어 있다. 방향이 틀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제자리걸음 하는 료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모습 그대로다. 새로운 소설을 쓰게 된다거나, 아내와의 관계가 회복된다거나 하는 '영화에서 일어날 법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료타에게 마음을 뺏긴다. 꿈꾸는 대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 되고 싶은 어른이 되기 어렵다는 것,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태풍이 부는 날 저녁 료타는 아들 싱고와 문어 미끄럼틀로 둘만의 모험을 떠난다. 부모의 불화로 내내 주눅 들어 있던 싱고가 가장 들떠 보이는 장면이다. 짐짓 어른스러워 보이는 싱고지만, 복권이 되면 가족 모두 함께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가진 아직 어린 아이다. 미끄럼틀 안에서 습기에 차눅눅해진 과자를 "그래도, 맛있어" 라며 먹는 싱고가 애틋하고, 귀여웠다. 음료수를 뽑으러 미끄럼틀 밖으로 나갔다가 바람에 날려간 복권을 애타게 찾는 싱고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쩐지 이 날의 추억이 싱고에게 따듯한 기억이 될 것만 같다.
<태풍이 지나가고> 스틸컷 중에서
행복이라는 건 말이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 거야.
영화에서 료타의 어머니가 했던 말을2020년 마지막 글의 마지막 문장으로옮겨둔다. 기록하면 잊지 않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