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을 사는 일

생계가 해결된다면 남은 돈으로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

by 기꺼움

서율아, 엄마야.


오늘은 돈 이야기를 해볼까? 아홉 살 서율이는 아직 돈에 대한 욕심은 없어. 친척 어른들께 용돈을 받아도 아빠에게 주거나, 아프리카 친구들을 돕는데 써달라며 엄마한테 맡기지. 엄마도 그랬던 것 같아. 초등학교 시절에는 너무 개념이 없어서 문제가 된 날도 있었어.




하루는 학교 앞 문구점에서 외상을 하고 200원짜리 불량식품을 사 먹었거든(외상은 돈은 나중에 내기로 약속을 하고 물건을 먼저 가져오는 거야). 쥐포를 먹었는지, 아폴로를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둘 중 하나 일 거야. 꿀을 빨듯 맛있게 먹으며 집에 왔지. 돈이 없던 엄마가 뭘 먹으면서 들어오니까 할머니는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셨어. 천진하게 외상 했다고 말했던 것 같아. 가방을 내려놓을 틈도 없이 할머니 손에 이끌려 다시 문구점으로 가야 했어.


할머니와 함께 200원을 갚고, 집으로 오는 내내 외상은 절대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몇 번을 들어야 했지. 그 뒤로 외상은 안 했어. 어른이 돼서도 미리 돈을 쓰고 다음 달에 갚아야 하는 신용카드를 쓰는 건 별로야. 가끔은 그렇게 정신 바짝 차리게 혼날 필요도 있나 봐.




서율아, 인생을 살면서 돈은 정말 중요해. 돈이 있어서 삶을 꾸릴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거든. 생계를 해결하고 난 뒤, 남은 돈으로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 넓은 집, 큰 차, 명품 가방? 좋아,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더 넓은 집, 더 큰 차, 더 비싼 가방을 원하면 원할수록 내가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돈이 나를 좌지우지하게 되지 않을까? 뭔가 벗어나기 힘든 쳇바퀴 안에 들어간 기분일 것 같아.


생활이 안정되어 있다면 돈으로 물건이 아닌 경험을 사면 좋겠어. 책을 읽고, 공연을 보고, 여행을 가는 그런 경험 말이야.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인 경험은 심지를 단단하게 해 주거든. 그렇지만 멋진 옷이나 값비싼 보석들과 달리 경험이 만들어내는 변화는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어서 답답할지도 몰라. 그럴 땐 엄마의 편지를 떠올리며 시간에게 여유를 주렴. 경험은 너를 분명하게 성장시킬 거야.


엄마는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어(화장품이나 옷을 살 때는 한참 망설여야 해). 엄마가 살 수 있는 경험 중에 가장 잘 맞는 건 책이었거든. 소설을 읽는 게 즐겁고, 다른 이의 삶을 통해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게 좋아. 몸 안에 책이 쌓이는 상상을 자주 해. 한 권 한 권 쌓일수록 무겁고, 신중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물론 반드시 책이어야 하는 건 아니야. 서율이에게 맞는 경험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걸 위해서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충분해.




서율이에게 편지를 쓰다 보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많이 떠오르고, 엄마의 생각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게 되는 것 같아. 아마도 서율이와 엄마의 관계 안에서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를 돌아보게 돼서 그런가 봐. 앞으로 어떤 편지를 쓰게 될지 궁금해진다. 오늘은 여기까지!


2019년 뜨거운 여름을 통과하며 아이들에게 매일 쓴 편지를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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