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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Jan 01. 2020

[오늘, 책] 사건_아니 에르노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지난주 서울 구경을 가서 당인리 책발전소에 들렀다. 적당한 규모의 책방은 큐레이션 된 책을 모두 둘러볼 수 있어 좋다. 언젠가부터 책방에 가면 모르는 작가의 처음 보는 작품을 구매하는 버릇이 생겼다. 작가와 책, 책방은 동시에 기억되고, 오래 남는다.(책을 펼치면 책방의 풍경이 떠오르고, 책방을 떠올리면 책이 생각난다.)




  민음사에서 나온 『사건』은 판형이 너무 마음이 들었다. 시집 크기의 얇은 책인데 세련되고, 날렵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 난다. 띠지에는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장, 칼 같은 글쓰기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용기 있는 고백록'이라고 적혀 있다. 칼 같은 글쓰기, 용기 있는 고백이라는 문구에서 오는 이질감이 마음에 끌렸다. '용기 있는 고백'을 '칼 같은 글쓰기'로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에르노는 해냈다. 정말 그랬다. 이 글은 1963년 10월부터 1964년 1월 25일까지는 기록이다. 이제 막 지적 성취를 꿈꾸고 있던 대학생의 원치 않는 임신, 임신 중절이 법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치러야 했던 불법 수술과 그로 인해 겪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몸과 마음의 상태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글쓰기를 작가는 해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 사건 79쪽 중에서


  아니 에르노의 글은 보편적인 무엇이 되어 독자인 나에게 닿았다. 그녀의 경험을 통해 유산과 임신으로 인한 몸의 고통이 상기되었고, 감정적인 동요를 겪어야 했다.(더이상 임신 중절이 금지되지 않는다는 점은 내내 다행스러웠다.) 임신과 동시에 태아가 중심이 되며, 모체는 보호받기 어렵다는 어느 작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성애를 거룩하고 아름답다고 명명하는 순간, 여성은 그만큼의 희생을 요구받는다. '좋은 엄마'라는 이상을 쫓으며 평생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엄마, 여성이 아닌 오롯이 '나'라는 사람을 보게 된다. 삶을 응원하는 문장은 단 한줄도 찾을 수 없지만, 나로 잘 살고 싶어지게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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