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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Jan 04. 2020

[오늘, 책] 헝거_록산 게이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예쁨', '스타일', '정상성'에 온 신경을 쓰면서 자신과 타인을 억압하는 모든 이에게 권한다. 그리고 인생이 힘든 모든 이에게 권한다. 용기란, 인생이란, 페미니즘이란, 글쓰기의 모범이란 이런 것이다.
 - 록산 게이 『헝거』(사이행성, 2018) 추천사 중에서(정희진)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 2016)의 저자인 록산 게이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이슈에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아 책을 읽는 일을 미루던 차였다. 주변에 많은 상황들이 가부장제라는 틀을 갖추고 있기에 페미니스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일상에 저항해야 하는 마음을 감당할 자신 없었다.(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태도가 한없이 편하기도 한 법이니까.) 


  그래서 읽게 된 책이 『헝거』이다. 록산 게이라는 작가가 궁금했지만, 선뜻  『나쁜 페미니스트』를 집어 들기도 어려운 내게는 차선책이었다. 헝거를 모티브 삼아 기획된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통해 자신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꾸준히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성폭력을 경험한 이후 끊임없이 먹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록산 게이. 190cm에 190kg이 넘는 그녀는 매 순간 몸 안으로 숨었다. 현재까지 진행 중인 치열한 삶의 기록들을 339페이지에 걸쳐 술회한다. 거대해진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냉소적인 시선과 내상으로 인한 정신적인 피폐함. 일순간 용기를 내다가도 한없이 추락해버리는 자신을 감당하며 굳건하게 써 내려간다. 록산 게이는 이런 문장으로 책을 열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고 역사가 있다. 지금 이곳에서 내 이야기와 내 역사를 들려주려 한다. 내 몸과 내 허기에 관한 고백을 하려 한다.
 - 록산 게이 『헝거』(사이행성, 2018)  21쪽 중에서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이야기와 역사가 있지만 누구도 쉽게 말하기 어렵다. 록산 게이는 달랐다. 『헝거』를 채우고 있는 많은 문장들이 맨몸으로 돌격하는 무사처럼 비장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써낸 글에는 그 자신을 지켜줄 무엇도 없기에 솔직함을 넘어서 결연하다. 그렇게 낱낱이 드러냈기에 세계 많은 이들이 응답하고, 덩달아 용기 내어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는 것일까? 


  록산 게이의 책을 읽으며 수많은 편견을 직면했고, 내가 가진 정상성에 대한 욕망을 또다시 깨달았다. 단지 그것을 알아챘을 뿐이다. 여전히 마른 몸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아름다움을 쫓을 테지. 그러나 나는 책의 힘을 빌려 계속 두드릴 것이다. 나를 가두는 편견에 서서히 금이 가고, 어느 순간 쨍하고 깨질 날이 올 거라는 것을 믿는다(아니 믿고 싶다). 


내 비밀을 삼키면서 내 몸은 부풀고 또 부풀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숨을 수 있는 방법, 절대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밥을 주는 방법, 상처를 멈추고자 하는 이 갈급함을 채울 방법을 찾아냈다. 나 자신을 더 크게 만들었다. 나를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 나에게 감히 접근하려고 하는 사람이 오지 못하게 확실한 선을 그었다. - 록산 게이 『헝거』(사이행성, 2018)  82쪽 중에서
나 자신을 바꾸고 싶지 않다. 내 외모를 바꾸고는 싶다. 기운이 좀 있는 날에는, 투쟁심을 발휘하여 세상이 나의 외모에 반응하는 방식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상적으로 생각해보면 진짜 문제는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운이 없는 날에는, 내 인격, 즉 나라는 사람의 본질과 내 몸을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지 잊어버린다. 이 세상의 잔인함으로부터 나를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 록산 게이 『헝거』(사이행성, 2018)  174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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