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밥상이 차려지는 식탁이 밤에는 나만의 책상이 된다. 노트북에 전원이 켜지고, 읽다만 책들이 펼쳐진다. 독서대가 자리를 잡고, 짙은 밤색의 필통 안에 연필과 지우개가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식탁 의자에 앉은 나는 그제야 마음의 허기를 채운다.
종일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다.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병렬 독서를 하는 나는 플레이리스트가 다양하듯 읽는 책도 다양하고, 그때그때 다르다. 진솔한 에세이를 읽고 싶은 날, 생생한 언어가 팔딱거리는 시를 읽고 싶은 날, 유쾌한 때론 슬픈 소설을 읽고 싶은 날! 마음의 온도에 맞춰 적당한 책을 선택해서 읽으면 독서 생활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오늘은 임레 케르테스의『운명』이란 소설을 읽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이야기다. 주인공 죄르지는 열네 살이다. 소년은 죽음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수용소의 하루하루를 담담하고, 객관적인 문체로 술회한다. 하지만 당시의 잔혹한 현실은 감춰지지 않기에 감정적으로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이다. 행간에 숨겨진 진실을 더듬으며 천천히 읽는다.
이렇게 책을 읽는 시간은 내 삶을, 생활을 조금 동떨어진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만든다. 고요한 마음으로 하루를 돌아본다. 무겁게 누르던 이런저런 걱정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다. 책이 아니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감정을 통과하며, 내 삶은 인정하고 아껴주는 시간이다. 오늘의 지친 한숨은 자정을 전후로 내일을 준비하는 심호흡이 된다.
이제 책을 덮고, 글을 쓴다. 잡동사니로 어수선해진 방을 청소하듯, 이곳저곳에 굴러다니는 생각들을 제자리에 정리한다. 글을 쓰는 작업을 통해 나를 돌아본다. 글을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을 알아채고, 최대한 정확히 쓰는 연습을 한다. 그런 연습은 말이나 태도에도 영향을 끼친다. 무심코 내뱉은 말은 없는지 곱씹고, 반성하게 된다(소심해지는 것인지 신중해지는 것인지 가끔 헷갈리기도 하지만). 글이 나를 닮아가고, 내가 글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만의 시간은 대부분 이렇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이 중심이었고, 노래는 선택사항이었다(듣기도 하고, 듣지 않기도 하는). 플레이리스트 모임에서 글을 쓰고부터는 매일 음악을 듣는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음악이 많았다니 감동하고, 감탄한다. 음악을 플레이하고, 글을 읽으면 울림이 훨씬 크다는 것도 덕분에 깨달았다. 며칠 전에는 노래를 들으며, 함께하는 작가님들의 글을 읽는데 정말 다른 시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더없이 충만했고, 행복했다.
더 읽고, 쓰고 싶지만 이제 잠들 시간이다. 잠이 부족하면내일이 흐릿해진다. 아이유가 부른 무릎이란 노래를 듣는다. 깊은 잠을 준비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노래,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던 아이유가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만든 노래라고 한다. 누군가 잠들지 못하고 만든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 아이러니라니. 밤이라 부르기도, 새벽이라 부르기도 어중간한 시간, 지금은 열두 시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