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부친 편지

playlist, 바람이 불어오는 곳_제이레빗

by 기꺼움


# 1



2019년 11월 7일 새벽, 여기는 제주도입니다. 여행에 들뜬 아이들이 평소보다 늦게 잠이 들어 이제야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편지를 쓰듯, 일기를 쓰듯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여행에 있어서 만큼은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기에 평소보다 지친 새벽이지만 고요한 가운데 글쓰기로 에너지를 채워봅니다. 오늘은 유독 기다림을 많이 겪었던 하루였습니다. 새벽안개로 비행기는 연착되어 공항에서 두 시간이 넘게 기다렸고, 차를 렌트하면서도 꽤 오래 대기해야 했습니다. 겨우 찾아간 식당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럼에도 우리의 표정은 연신 밝았습니다. 여행이니까요. 물살이 세게 흐르는 시공간에서 물결이 반짝이는 호수로 옮겨온 듯했습니다. 공항에서 마주한 얼굴들은 출퇴근 시간 분주한 얼굴이 아닌 특유의 느긋한 모습이었고, 렌터카를 기다리면서도 시계가 아닌 하늘과 야자수를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식당에서도 번호표를 들고 서 있으면서도 조급해지지 않더라고요. 시간에 쫓기지 않는 기분을 오랜만에 만끽했습니다. 4박 5일의 여행의 첫째 날이 찬찬히 별일 없이 지나갑니다. 글을 쓰는 일도 그렇게 잔잔하게 해 보려고요. 특별히 구상하지 않고, 퇴고하지 않고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이에요.


#2



이제 막 자정을 넘기고 11월 8일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아이들을 재우다 함께 잠들어버렸는데, 글쓰기의 힘은 대단합니다. 졸린 제 눈을 뜨게 했으니까요. 오늘, 아니 이제 어제 아침이네요. 숙소에 밤늦게 도착한 탓에 창이 큰 펜션이었지만, 밖을 볼 수 없이 잠들었습니다. 햇살이 잠을 깨워 일어나 보니 제주 바다가 보을까요? 아뇨. 창밖으로는 제주의 시골 풍경이 보습니다. 너른 밭에는 갓김치를 담가 먹는 갓으로 추정되는 초록 작물이 자라고 있더라고요. 난생처음 만난 초록 바다가 넘실거리는데 마음이 꽉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장면을 시작으로 어느 때보다 빛나게 마음을 채웠던 순간을 종이 위에 기억해두려고 합니다. 신화월드라는 놀이동산에 도착해서 가족 모두 회전목마를 탔습니다. 아홉 살 딸아이는 제 옆에서 목마를 타며 새실 새실 웃고 있었습니다.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목마는 제가 내려가면, 딸이 올라가고, 제가 올라가면, 딸이 내려가더라고요. 그토록 단순한 움직임이 회전목마에서는 낭만적이 된다는 건 언제나 신비롭습니다. 학교에 가기 싫다며 매일 징징던 딸내미가 여행의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이 눈부시게 예뻐보습니다. 요즘 제 속으로 낳은 자식도 때때로 미워질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던 녀석이었는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그저 사랑스럽던 두 돌 무렵으로 돌아간 것 같더랬지요. 그 한순간 만으로도 이번 여행이 제 몫을 다했다는 마음이 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이죠. 꽤 오래 걷고, 온종일 불어는 제주 바람을 상대해야 해서 겨우 나았던 감기가 더 심해졌지만 충분히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다시 숙소에 도착할 땐 아침에 본 초록 바다는 어둠에 숨고, 하늘 위에서 별들이 총총 반겨주었습니다. 내일도 햇살 알람을 받으며 일어나겠지요. 바람이 잦아지길 소원하며 오늘도 늦은 잠을 청하려고 합니다.



#3



11월 8일입니다. 아직 자정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TV를 껐다며 심술 난 딸은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고, 아들은 베란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제주도 바람을 맞으며, 아빠에게 다금바리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부 아저씨의 그물에 잡혀버린 슬픈 다금바리 이야기는 글을 쓰는 제 귀도 자꾸 솔깃하게 합니다. 이럴 때면 이야기보따리는 저보다 남편에게 훨씬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의 소원이 이뤄져 오늘은 바람이 적당한 제주를 만났습니다. 노랗게 익은 감귤을 따며, 멀리서 위용을 뽐내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짙은 남색 빛 바다향을 맡으며 제주에 왔음을 온몸으로 감각했습니다. 저 멀리 방파제로 먼저 뛰어갔던 아이들이 다시 엄마를 부르며 달려와 안길 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벅찬 마음도 만났습니다. 오후에는 숙소를 옮겼습니다. 너른 마당이 있는 집입니다. 방마다 나있는 커다란 창으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게 될 상상을 하니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뛰어다니기를 한창 좋아하는 아이들이지만, 차들이 많은 아파트 단지에서는 조금만 뛰어도 다그치게 되기 일쑤거든요. 내일은 그저 흐뭇하게 쳐다만 봐도 되겠지요. 불을 끄고, 잠들지 못하는 여섯 살 아들 옆에 누웠습니다.


“엄마, 고마워요.”


“뭐가?”


“예쁜 엄마로 태어나줘서요.”


아이의 마음에도 바람이 부는가 봅니다. 이렇게 다정다감한 말로 엄마의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어주네요. 이제 함께 자야겠습니다. 아들이 건네준 예쁜 말만 얼른 쓰고, 다시 눕겠다고 했거든요.



#4



여행에서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행의 마지막 날 기억을 불러옵니다. 11월 가을 끝 제주는 사람이 붐비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약간 차가워진 깊은 가을의 날씨를 느끼며 또 하루를 보냈습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천장이 낮은 작고, 훈훈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훌쩍 큰 키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사장님이 인상적입니다. 아메리카노와 브라우니를 내어주고, 백열전구가 켜진 그의 공간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살짝 들여다본 그곳에는 어쩐지 창작자의 향기가 나는 듯합니다. 못내 궁금한 마음을 누르고 커피숍을 나섭니다. 우리는 캄캄해진 바다를 끼고 걷다가, 숙소까지 나있는 인적 없는 시골길을 다시 걷습니다. 개들이 컹컹 짖는 소리조차 근사하게 느껴지는 밤입니다. 짙은 어둠에 잠겨야 비로소 빛을 뿜는 별들이 밤하늘에 가득합니다. 그중 반짝반짝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별이 보입니다.


“저기, 반짝이면서 움직이는 건 별이 아니라 비행기지?”


“음, 비행기가 아니라 인공위성 아닐까?”


“아빠. 인공위성이 뭔데?”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던 순간에 시간은 다시 멈춘듯합니다. 카메라 셔터가 눌리고, 아름다운 기억이 ‘찰칵’하고 찍힙니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지만 제주 여행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냐고요? 그건 제가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써볼 수 있었습니다. 평소라면 머릿속에 어느 정도 구상이 되어야 쓸 수 있었는데, 이번엔 미리 고민하지 않았거든요. 그저 백지를 앞에 두고 무작정 썼습니다. 일기를 쓰듯, 편지를 쓰듯 적어낸 글을 다시 읽습니다. 시간에 의해 변형되지 않은 생생한 감정들은 저를 그 시간, 그 장소로 데려갑니다. 노트북을 챙겨가길, 일단 쓰기 시작하길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여행지에서는 모든 순간이 글감이 돼주었습니다. 삶을 여행하듯 살 수 있다면 우리 삶은 모두 글이 될 수 있으려나요? 제주에서 읽은 허은실 시인의 『내일 쓰는 일기』라는 산문집에서 함께 쓰는 분들과 나누고 싶은 페이지 끝을 살짝 접어두었습니다. 책의 문장을 옮기는 것으로 제주에서 보내는 편지를 갈무리합니다.


‘작가의 장벽’(Writer’s Block)이란 말이 있다. 마음속에 어떤 장벽이 생겨서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상황. 그 ‘장벽’이란 건 체로 좋은 글, 감동적인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걸 극복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한다. 그냥 아무거나 쓰는 거다. 말이 되건 말건 무조건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나중엔 정말 말하고 싶은 걸 쓰게 된다는 이야기.
- 허은실 『내일 쓰는 일기』 144~145쪽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N8sLRPpfgng&list=PLa8akc3Kuq33Z9oBNhshG7IZPzmQz5jxw&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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