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도는 따뜻했다

playlist, 만년필_이내

by 기꺼움


# 1


나는 사람이든 공간이든 익숙해지기까지 오래 걸리는 편이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 몸이 어떻게 알아차리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의 곳곳에 담겨 있다. 그런 내가 2019년에는 꼼지락꼼지락 작은 시도를 해보는 중이다. 블로그를 열고,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고, 책을 만들고, 공모전에 글을 보내기도 했다(물론 탈락이다). 대부분 노트북 앞에 앉아서 했던 일들이지만, 그중 몇 번은 집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혼자서 씩씩하게). 여름에는 서울 국제도서전에 가고, 가을을 보내며 독립서점에서 시인과 소설가의 강연을 들었다. 일면식 없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리 없이 앉아 있다가 미소 지으며 돌아오는 걸음은 언제나 좋았다.



#2


‘길 위에 음악가’, ‘동네 가수’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이내 작가의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를 읽고 있다. 책을 펼치면 작은 모닥불 앞에 앉아 온기를 느끼는 기분이 된다. 어쨌든 시도한 일들이 가져다준 귀한 인연과 인연이 만들어낸 잔잔한 파장을 이야기하는 에세이다. 행간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엇이든 일단 해보면 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용기 내서 나가 보세요.”


마치 요즘 멈칫거리는 일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책이 자꾸 말을 걸었다. 좋아, 시도해보자. 그렇게 나는 부산에서 열리는 사이숨 책소동, 슬로우 북페어 현장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는 글쓰기 모임을 운영하며, 두 권의 책을 만들어준 에디터님과 동네 가수 이내님이 계실 것이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오려면 용기를 내야 했다(여느 행사처럼 소리 없이 있다가 나올 수는 없었다). 지원군을 한 명 데리고 가야겠다. 얼마 전부터 둘만의 데이트를 간절히 원하는 딸내미와 함께해야지. 우리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졌다.



#3


일요일 아침 역시 비가 온다(내가 비를 부르는 것인지, 비가 나를 따라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달갑지 않다). 잘 찾아가야 할 텐데, 불안과 걱정이 뒤섞인다. 대전에서 KTX를 타고 부산역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이쯤이야). 이제 부산 중앙동에 있는 ‘오붓한’이라는 공간을 찾아가야 했다. 역에서 차를 타고 15분 정도 걸리는 멀지 않은 거리다. 가급적 근처까지 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동 수단은 택시를 선택했다. 역 앞에는 택시가 줄지어 있었지만 타지 않았다. 손님을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가까운 장소를 간다고 말하는 건 면목이 없다. 우리는 조금 걷다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탔다. 안타깝게도 기사 아저씨는 ‘오붓한’이 어디인지 모르셨고, 중앙역 9번 출구에 내려주셨다. 카카오 맵을 켜고, ‘오붓한’까지 5분이면 가는 거리를 한 시간 넘게 헤맸다. 악보를 봐도 피아노를 칠 수 없듯이, 지도를 보면서도 길을 찾지 못했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딸내미가 말했다. 여행이 아니라 극기훈련을 온 것 같다고. 신발과 옷은 반쯤 젖어버린 후였다. 도저히 못 찾겠다 싶어 질 즈음 골목에서 작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불투명한 창문을 꽉 채운 불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도착했어!



#4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침 동네 가수 이내님의 공연이 진행 중이었다. 빗물에 젖은 옷과 머리를 털고 앉아 노래를 들었다. 먼 길 찾아오느라 고생했다고 건네는 위로처럼 들렸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지 않은 몇 개의 테이블 위에 놓인 독립출판물, 문구용품 등 열정이 담긴 창작물, 스마트폰으로 공연을 촬영하고 계신 에디터님(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인스타그램 덕분이다), 노래에 호응하는 열명 남짓의 사람들. 현실 감각은 흐려지고, 책의 어느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포근했고, 평화로웠다. 몇 곡의 노래가 이어졌고, 공연은 여운과 온기를 남기며 마무리되었다. 관객들은 저마다 창작자들의 테이블로 눈길과 걸음을 옮겼다. 이제 에디터님께 인사를 건네야지. 내가 나임을 밝히기 전까지는 일단 괜찮았다(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으니까).



#5


“기꺼움 작가입니다.” 내 필명을 직접 소리 내 말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너무 부끄러웠다). 몇 초의 정적. 다시 한번 “저.. 기꺼움 작가입니다.”(역시 부끄러웠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에디터님도 놀라신 듯했지만, 정말 반갑게 맞아주셨다. 인사를 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내 영혼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구체적으로 상황을 묘사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다만, 진심 어린 환대로 가득했던 분위기만은 생생하다. 동네 가수 이내님께 다가가 사인을 받고, 2집 앨범을 선물 받았다. 그녀의 테이블에서 남해의 사계절이 담긴 사진집을 한 권 샀다. 좋아하는 일을 차분차분 해내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의 공기는 특별했다. 시기도 질투도 없는 무해한 공기라고 표현하면 적당할까? 맑은 에너지가 온몸에 가득 찰 때 즈음 배웅을 받으며 사이숨 책소동 현장을 나섰다. 비 내리는 일요일 오후, 부산의 거리는 한산했다. 우리는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아메리카노와 딸기 스무디를 시키고, 노트에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적었다. 서율이가 끄적인 시를 읽고,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웃고 말았다.


계단 공포

계단을 성큼성큼
20개의 계단이 남았는데
헉헉 헉헉
힘들다 소리 100번 하게
만드는 계단



#6


부산에서 남은 일정은 극기 훈련(?)을 마친 딸을 위한 시간으로 채웠다. 행선지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용두산 공원으로 정했다. 커피숍 사장님께서 찾아가는 길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셨다. 부산영화체험 박물관, 트릭아트 뮤지엄 등 볼거리가 많았다. 날은 금세 어두워졌고, 우리는 야경을 보기 위해 부산타워로 향했다. 박물관 출구에서 연결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바람은 스산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한 개의 우산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걸으며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요즘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화내는 엄마와 짜증 내는 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7


모든 시도는 따뜻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일들이 그랬고, 지난 주말 부산 여행 역시 그랬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일에는 나와 닮은 사람들이 있고 이들과 함께 글을 나누는 일은 굉장히 근사했다. 음악은 다양한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 준 티켓이라고 했던 싱어송라이터 시와의 인터뷰를 떠오른다. 나에게는 책과 글이 그렇다. 티켓 하나를 손에 꼭 쥐고서 소중한 인연을 맺고, 맺어가는 중이다. 끊임없이 경쟁하며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날들(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조금씩 변해간다. 글이 이어준 세상에서 나는 기꺼이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걸 아니까. 가을을 맞이하며 시작한 글이 겨울의 시린 햇살을 받으며 끝인사를 한다. 아쉬운 마음을 접어 두고, 담담하게 보내며 다짐한다. 내년에도 크고 작은 시도 안에서 한껏 따뜻해야지.



* 이내 작가의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이후진프레스, 2018)』라는 산문집의 제목에향을 받아지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XpNLpDY8DU&list=PLa8akc3Kuq31EIz9TDTR4ZLckP456_90H&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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