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위 링크의 후속 글이다. 저 글을 보고 온 뒤에 이 글을 읽는 것을 권장한다.
<미국의 화장실은 한국과 무엇이 다른가?>란 글에 몇가지 의미있는 피드백이 왔다. 그 피드백을 원글에 반영하는 것보다는 또다른 글을 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 글은 미국이나 한국의 규정이 어떤 지에 대해선 다루지 않을 것이고, "법이 그렇다"라는 댓글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뵈기 싫어서 해당 댓글을 삭제할 수도 있다. '최선'이 '규정'과 부딫힌다면 '규정'은 바뀌어야한다. 그러므로 "법이 그렇다"라는 식의 보수주의적 태도를 이 글에선 의도적으로 거부할 것이다. 다만, '최선'이 그러하니 '규정'이 그렇게 되었더라, 라는 식의 어투는 있을 수도 있으며, 그러한 태도는 딱히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남녀공용화장실 2개가 남녀 각각의 화장실 2개보다 나은 이유
앞선 글에서 나는 미국의 2개로 구성되는 남녀공용화장실이 남녀 각각의 화장실이 있는 것보다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한 영업장에 화장실을 2개만 둘 수 있다면, 각각의 남녀 화장실을 만드는 것보다는 확실히 남녀공용화장실 2개를 만드는 게 합리적이다. 한 공간이 비어있을 때 무의미하게 줄을 서는 것은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남녀공용화장실을 2개 두는 이유는 (규정이 어쨋건 간에) 건물 자체가 작기 때문이다. 건물이 작아서 화장실을 2개밖에 만들 수 없다면 건물주나 영업주에겐 다음과 같은 옵션이 있다. 화장실은 무조건 만들어야한다고 전제하자.
옵션A, 남녀공용화장실을 2개 만드는 경우
옵션B, 남녀 각각의 화장실을 2개 만드는 경우
옵션A를 따른 영업장의 화장실을 상상해보자. 두 명의 남자가 동시에 화장실을 간다면 줄은 생기지 않는다. 두 명의 남자가 2개의 화장실을 각각 쓰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명의 남자가 옵션B를 따른 화장실에 가게 된다면 남자 한명은 남자 화장실을 쓰고,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한 남자 한 명은 필연적으로 줄을 서야 한다. 그리고 여자화장실은 비어있는 채로 낭비된다. 이 사례에서 '두 명의 남자'를 '두 명의 여자'로 바꾼다면 옵션B를 따른 영업장에서 남자화장실이 낭비될 것이다.
따라서 화장실을 2개만 둘 수 있는 영업장이 있다면 옵션 A를 따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옵션 A를 따라서 만들어진 남녀공용화장실들은 장애인들까지 배려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할 것이다. 이는 남녀공용화장실을 만든 뒤에 장애인용화장실을 또 두는 것보다 비용합리적이다.
한국은?
우리나라의 경우, 영업장이 1개의 남녀공용화장실만을 두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 1개의 남녀공용화장실은 장애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개선책이 마련되어야한다.
미국이 남녀 각각의 화장실을 두는 경우
미국의 어떤 곳들은 남녀공용화장실 2개를 두기보다는 남녀 각각의 화장실을 둔다. 남녀 각각의 화장실을 두는 곳들의 특징은 건물 자체의 사이즈가 크다는 것이다. 왜 규모가 큰 곳에는 남녀공용화장실을 여럿 두지 않고, 남녀 각각의 화장실을 두는걸까? 벌써부터 '규정 때문에 그렇다'라는 답이 들려오지만, 그런 답은 노잼이고 생산적이지도 않다. 애초에 그런 규정이 있다면 그 규정이 왜 생겼는 지를 고민해봐야한다. 그리고 왜 그런 규정이 생겼는 지를 생각함에 있어선 '입법취지'같은 내용을 찾아보는 게 가장 좋겠지만, 나는 아직 그 내용에 어떻게 접근하는 지 모르므로 사고훈련을 통해 해당 내용을 추측해보려고 한다.
규모가 큰 곳에 남녀 각각의 화장실이 있는 이유
규모가 큰 건물의 건물주나 영업주가 화장실을 만들 때에는 다음과 같은 옵션이 주어진다고 해보자. 위에선 "옵션이 주어진다"라고 해놓고 여기에선 "옵션이 주어진다고 해보자"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옵션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자화장실의 경우 소변기와 양변기를 몇대몇 비율로 놓을 지에서부터 다양한 옵션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소변기 7개과 양변기 3개로 구성할 수도 있고, 소변기 5개와 양변기 5개로 구성할 수도 있는 게다. 여자화장실의 경우는 어차피 양변기로만 구성되니까 차라리 간단하다. 화장실은 무조건 만들어야하며, 변기는 소변기와 양변기를 포함해 최대 20개까지 설치할 수 있으며, 소변기를 설치하는 경우엔 소변기와 양변기의 갯수가 같아야한다고 전제하자.
옵션C, 남녀공용화장실 10개 만드는 경우
옵션D, 소변기, 양변기 각각 5개로 구성된 남자화장실과 양변기 10개로 구성된 여자화장실을 만드는 경우
옵션 C가 대형 건물에서 채택될 수 없는 이유
건물이 거대해서 필연적으로 화장실을 동시에 이용하는 고객이 많을 때 옵션C는 합리적인 대안이 아니다. 남녀공용화장실의 단점은 여러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입장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오로지 한명씩만 들어갈 수 있게 설계되어있다. 화장실 간에 벽들이 쳐져 있고 각각의 화장실에 들어가는 문도 다르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쓰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변기 간의 공간이 넓어질 수 밖에 없으며, 이 때 공간적으로 비효율이 발생한다. 소변기를 2개에서 3개까지 설치할 수 있는 공간에 양변기 하나 정도밖에 들어갈 수 밖에 없게 된다. 나는 옵션C의 총 변기수를 10개로 정해놓고 옵션D의 변기수는 남녀화장실을 합쳐서 총 20개로 전제했는데, 이는 옵션C를 따를 경우 같은 평수의 공간을 쓸 때 더 적은 변기를 설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남녀공용화장실이 대형 건물에 부적합한 이유다.
물론 내가 언급한 숫자들은 그저 상상적 사고에 기반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같은 공간을 남녀 각각의 화장실이 아닌 남녀공용화장실들로 만든다면 상대적으로 공간상 비효율이 발생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남자화장실에는 남자들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소변기를 근접해서 설치할 수 있다. 또한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에는 양변기 사이에 얇은 벽들만 세워둔채로 양변기를 설치할 수 있다. 남자들끼리나 여자들끼리는 사생활의 보장이 최소한으로만 보장되어도 괜찮기에 '얇은 벽'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쓸 수 있는 남녀공용화장실의 경우는 '얇은 벽'만으로 사생활의 보장이 필요한만큼 보장되지 않기에 '더욱 두꺼운 벽'이 요구된다. 그리고 '더욱 두꺼운 벽'은 공간상의 비효율을 발생시킨다.
10명의 남자와 10명의 여자가 동시에 화장실을 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옵션C를 채택하는 경우, 이 20명 중 10명은 필연적으로 기다려야한다. 하지만 옵션D를 채택하는 경우엔 공간상의 효율 혹은 규모의 경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여자 10명은 모두 화장실에서 일을 볼 수 있으며, 10명의 남자가 X을 싸려고한다고 가정해도 최대 5명만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이는 최대치이고, 남자 5명 이하가 X을 싸려고 한다면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남자화장실에 있는 양변기에도 소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은?
남녀각각의 화장실을 만드는 옵션D를 대형 건물에서 채택한다면, 그 중 일부를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게끔 할당해야하며, 이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할 것없이 대체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듯 하다(대형건물에서만 장애인을 배려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비극이다).
다만, 형태적으로는 다를 때가 있다. 어떤 화장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공간 내에서 일을 보게끔 설계해놓고 있으며, 또 어떤 화장실은 장애인들이 이용하는 공간을 방을 하나 따로 만들어놓고 있다. 후자가 장애인들을 더 배려한다는 것은 두번 말해 입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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