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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May 27. 2016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남성사회, 두 부류의 여성

명예남성과 여성을 중심으로.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영화는 남성주류사회에서 여성이 어떠해야하는가, 를 다루는 영화이기에 그 지점에서 주로 영화를 다룹니다. 남성주류사회를 만드는 사람들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아니냐, 라는 반론이 예상됩니다. 동의합니다. 다만 이 영화에선 그 주제를 다루지 않고, 이 글에서도 남성보다는 명예남성에 대해 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이 영화에 남성이 등장하여 김복남 등을 모두 구제해주는 구세주 역할을 했다면 이 영화가 보기에 아름다웠을까요?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딱 제가 원하는 종류의 결말을 보여줬습니다.



여성대상 폭력에 침묵하는 여성 해원

 

서울에서 한 여성이 남성들에게 폭행당하는데, 그것을 본 한 여성 목격자(해원)는 이를 보고도 못본 척 합니다. 피해자가 여성인 점, 그리고 현장에서 그녀를 돕지 않는 자가 여성이라는 점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나중에 목격자로 경찰서에 불려가지만 거기에서도 목격자는 피해자를 위해 증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남성의 폭력을 방조하죠.  


그 목격자-해원은 은행원인데, 폐지를 줍는 할머니에게 야멸차게 굴기도 합니다. 폐지를 주우며 대출을 요구하는 사람이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란 점은 의도된 겁니다. 해원은 할머니에게 대출이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 다른 은행원은 할머니에게 대출을 해줍니다. 거기에 빡친 해원은 '다른 은행원'에게 가서 이런 말을 합니다. 


"금융계통에서 여자가 엉덩이로 살아남는 데는 한계가 있어."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될까요? 말에 담긴 분노의 이유를 생각해볼 수도 있고, 말 자체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첫째로, 말에 담긴 분노의 이유는 뭘까요? 해원은 앞서의 '방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과 다른 여성이 피해를 입어도 나의 자존을 위해 침묵합니다. 그런 해원에게 '다른 은행원'의 행태는 꼴사나울 뿐입니다. 혼자 착한 척한다고 아니꼬워하는 모습이죠. 둘째, 말 자체의 의미로 해원의 말을 해석해보죠. 해원은 '서울'이란 공간이 남성권력이 지배적이란 것을 부정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해원은 남성권력에 굴복하고 싶어하지도 않죠. 즉, 그녀는 '엉덩이로 살아남는 것'에 부정적입니다. 이 대사만으로도 해원이 어떤 인물인지가 모두 해결됩니다. 


그녀는 '서울'의 비즈니스에서 '엉덩이'를 쓰지 않고, 결국 해고됩니다. 장철수 감독이 묘사하는 '서울'은 그런 곳입니다. '여성'이 '엉덩이'를 쓰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공간이죠. 남성들은 '엉덩이'를 쓰지 않는 여성을 참아주지 않습니다. 


'서울'을 떠나 '섬'으로 도피하는 해원 


'서울'의 삶에 지친 해원은 '섬'으로 갑니다. 하지만 섬은 훨씬 더 남성주의적인 사회죠. 서울에서는 여성이 살아남기 위해(회사에 남아있기 위해) '엉덩이'를 쓰고, 섬에서도 이는 유사합니다.


하지만 하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여성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섬에서는 그렇지 않다는거죠. 물론 섬에서도 원한다면 여성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남성주의에 찌들어버린 대다수의 여성-명예남성-들이 남성권력에 기생하는 시점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복남이라는 괴물이 탄생할 수 밖에 없는거죠. 비현실적인 공동체에서 비현실적인 존재가 탄생한다는 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섬에 사는 여성들이 남성권력에 기생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면 '김복남'이라는 존재는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서울의 남성, 여성


서울의 남성은 세 부류가 있습니다.

(1)여성을 폭행하는 남성들

이들은 여성을 (성)폭행합니다.

(2)기업의 오너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여성만을 '인정'합니다. 

(3)경찰 

국가 당국을 상징합니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서울의 여성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남성에게 폭행당하는 여성

(2)'엉덩이'를 사용하는 은행원

남성권력에 기생하거나, 희생되는 여성

(3)그것을 방관하는 여성

서울의 은행원 해원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 막바지에 각성합니다. 


섬의 남성, 여성

섬의 남성은 한 부류 밖에 없습니다.

(1)폭력적인 남성들. 

그들은 부인이 집 마당에 있는데도 여성을 불러 집안에서 소리를 내며 섹스를 합니다. 발로 차기도하고,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고, 따귀를 때리기도 하죠. 섬에선 남성들의 폭력이 일상화되어있고, 여성들도 당연한듯 받아들입니다.


'섬'에서의 여성은 어떨까요? 여성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1)남성권력에 기생하는 여성

(2)남성에 의해 피해입는 여성


(1)은 (2)를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성을 두둔하며 (2)를 비판합니다. "여자는 좆이나 물고 살아야한다"던지, "여자는 시집이나 가고 여행 따위는 다니지 말아야한다"고 말합니다. 한 남성이 어린 아이를 죽게 만들어도 (1)의 여성들은 남성의 잘못을 감싸주기에 바쁩니다. 


이런 것들이 경악스러운 이유는 (1)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인간적 권리를 '전혀' 모른다는 것에서 오지 않나 싶습니다. 스스로 제 살을 깎아먹고 있다는 것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죠. 하지만 그들을 연민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들도 사실상 남성 폭력에 있어서 공범이니까요. 이런 그들을 전문용어로 명예남성이라 부릅니다.


백인보다 더 백인같은 흑인(왼쪽)


남성권력에 공조하는 여성들-명예남성들과 비슷한 인물은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도 나옵니다. 거기에선 하얀 머리의 흑인이 백인의 흑인대상 인종차별을 돕죠. 그래서 주인공 장고는 그를 "니는 백인보다 더 백인같다 색히야"하면서 죽입니다. 각성한(?) 김복남도 여성들을 죽입니다. "니들이 남자들보다 더 남자같어"라는 대사를 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이 대사를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겠죠. 


김복남


섬은 폐쇄적입니다. 그 흔한 CCTV도 없고, 파출소도, 경찰서도 없습니다. 누가 사람을 죽여도 섬 내에서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입을 꾹 닫으면 알려지기 힘듭니다. 고인 물이 썩듯, 폐쇄된 곳이 썩는 것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딱 저런 상황에서 여성이 성폭행당하고, 강간임신까지 한다면, 여성이 취할 수 있는 스탠스는 세가지입니다.


(1)남성에게 당하고 살거나, 

(2)남성에게 기생하거나, 

(3)김복남처럼 각성하여 남성을 죽이거나.


김복남은 자식의 죽음 뒤에 각성합니다. 그리고 눈부시게 해가 떠있을 때 살인을 시작하죠. 이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영화적으로도 보통 살인은 낮에 일어나기 보다는 밤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밤에 살인이 일어나게끔 연출하는 이유는 감독들마다 그 의도가 다르긴 하겠지만, 살인이라는 행위가 애초에 은밀하게 실행되고, 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인 것으로 전 생각합니다(영화마다 개별로 해석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지요). 


그런데 김복남의 살인은 낮에 시작됩니다. 게다가 김복남의 살인이 시작될 때 주변에  있는 모든 자들은 그 살인 행위에 대해 인지하고 있죠. 심판자들은 언제나 죄인들이 아무도 모르게 죽게하기보다는, 대낮에 죄인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끔 환경을 만들고 죗값을 치르게 했죠. 죄인들은 죗값을 받을 때, 자신에게 날아오는 칼날을 모를 수 없습니다. 해가 뜬 이유는 김복남이 일종의 심판자이기 때문일 겁니다.


다만, 김복남의 행위가 자연스럽고 비난하기 힘들지언정, 그것을 지지하고 응원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녀는 이러나저러나 살인마니까요. 영화라는 장르에서 죄를 지은 자는 결국 벌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영화라는 법정에서 죄와 벌을 판단하는 판사는 감독이죠. 김복남은 결국 죽습니다. 우리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라는 이 영화를 통해 얻어야할 교훈은 "김복남이 되자"가 아니라 "김복남이 나올 수 없는 사회를 만들자."일 겁니다. 방관하고, 남성권력에 동조하는 것은 '나도 공범이요'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해원의 각성
김복남과 구별되는 해원
저 새끼에요!

장철수 감독은 남성 폭력의 희생자 여성을 방관하던 해원을 각성시킵니다. 그녀는 더이상 남성의 폭력을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안위만을 살피지도 않습니다. 스스로를 지키려하는 행동이 결코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한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김복남처럼 남성들을 살해하는 대신, 법과 절차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 지점이 김복남과 해원이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한 쪽은 행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던 섬에서 살았던 만큼 직접 칼을 빼드는 자경단의 길을 걸었다면, 나머지 한쪽은 철저히 법과 절차를 통해 일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해피엔딩?

해원의 각성은 확실히 의미있습니다. 이제 한 여성이 희생당할 때 그 여성을 도와줄 1명의 여성이 생겨난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알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알 듯이 여성이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시대에 장애물은 비단 남성 권력에 동조하거나 방관하는 여성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단단한 장애물들은 많이 남아있습니다. 감독도 그러한 현실을 모르진 않겠죠. 그래서인지 영화의 끝은 딱히 해피하진 않습니다. 영화가 끝나도 관객의 마음은 왜인지 모르게 불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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