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통해 내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존재
최근에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는데 그놈이 말했다. "그때 니가 싸이월드에 쓰던 글들 때문에 남자애들이 너한테 되게 관심 많았어. 친해지고 싶어했지." 고딩 때 싸이에 하루에 적어도 글 한두개씩을 끄적거렸었다. 요즘처럼 시사적인 이야기를 쓰기보다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잡상들을 글로 풀어냈다.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는 지에 대한 (개똥)철학쪽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거나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한다거나 하는 식의 처세술적인 이야기를 했었다.
한창 싸이월드가 인기일 때 대부분의 유저들은 사진첩들에 사진을 채워넣었지만 나는 싸이월드의 비주류 다이어리&게시판파였다. 난 내 글을 누가 본다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고딩 때 같은 학교를 다니던 남햏들이 내 글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2016년 6월에 와서 처음 들었다. 대략 10년 정도가 지나서 말이지. 뭣보다 신기했던 건 그 글들을 보고 걔네가 나와 친해지고 싶어했다는 거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이 글을 통해 내게 호감을 가졌다는 게 내게는 적잖이 놀라운 이야기였다.
걔네가?
나를?
글 때문에?
왜??????
비슷한 사례를 이번에 또 들었다. 고딩 때 선생님이라고 해야될지 형이라고 불러야될 지 애매한 분이 있었는데(형이라고 불렀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도 형이라 부르겠다), 이번에 그 형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다.
학원에는 이름만 아는 나보다 어린 아해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와 이야기도 딱히 나눠보지 않았고, 만나도 인사를 안하는 사이였다. 난 필요할 때가 아닌 이상 낯을 꽤나 가리는 인간이고, 누가 딱히 먼저 인사해오지 않는 이상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 아이가 어떤 타입이었는 진 모르겠지만, 우리의 사이는 딱 그 정도였다. 얼굴과 이름은 알지만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는 않는 사이. 같은 방 안에 있어도 말을 걸지 않는 사이.
이번주에 형에게 그 아해가 내 글을 완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뭥미 싶었다. 왜냐면 그놈이 나를 보는 눈빛이 뭔가 공격적이어서 나를 어떤 이유로 싫어한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내 글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뭥미했던거지. 더군다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년이 지난 뒤에 내가 페북에 끄적거린 글들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글이란 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형에게 누나인 분에 대한 이야기다. 나도 그 분과 몇번 만나보긴 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눈 적은 많지가 않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꾸려나가는 인간이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긴했는데 뭔가 날카로운 기운이 푹푹 박혔었다. "너는 영화과인데도 카메라에 대해 왜케 모르냐" 라는 식의 대화만 기억에 남는거 보면 날카로운 인상이 남은 모양이다. 그런데 그 분이 최근에 좀 이슈가 되었던 애교글을 보고 내게 꽤나 좋은 인상을 받아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형이 전해줬다. 신기한 일이다. 글이 대체 뭐길래?
토론 동아리에서 단 한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던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내가 쓴 연애칼럼을 완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제3자를 통해 들었다. 그 아이를 어느날 왕십리 6번 출구 앞에 있는 카페 아리가또에서 우연히 만났다. 팀플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날 보더니 팀원을 버리고 와서-팀원은 혼자가 됐다-대뜸 내게 말을 걸더니 자기 연애에 대해서 썰을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마 30분 정도 대화가 이어졌다. 팀원은 안중에 없는 느낌이었다. 대화 내용을 여기에 밝힐 순 없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수위가 상당히 높았다는 것 정도다. 24금 정도?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그 아이와 대화를 나눈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는 것.
글을 통해 호감을 느끼는 경우
내 글을 좋아하거나, 내 글을 보고 나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의 존재가 여전히 신기한 일이긴하다만, 생각해보면 나도 글로 적잖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꼈다. 아마 내가 '신기하다'라고 느꼈던 건 내가 그런 대상이 되었다는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알랭 드 보통. 난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고 그에게 꽤나 많은 호감을 가졌었고, 그 호감은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다. 그를 만나본 적도 없고, 그의 글에서 드러나는 모습 외에는 아는 것도 없음에도. 그의 글들을 읽다보니 오랜 대화를 나눈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막상 길거리에서 만나도 오랜 친구를 만난듯한 느낌일 것 같다. 막상 "우와 반가워요!"하면서 들이대도 알랭 사마는 나처럼 반가워해주진 않겠지만.
글을 통해 호감을 느껴도 막상 만나고보면 내가 상상했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As Good As It Gets>(한국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유명한 작가인 주인공 할배(잭 니콜슨 연기)는 자신의 팬을 우연히 만난다. 그 팬은 들뜬 모습으로 할배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여자들의 마음을 잘 아세요?" 그러자 할배가 답한다. "일단 남자를 상상하고, 책임감을 빼" 팬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굳는다. 내가 저 딴 인간의 글을 좋아했었다니, 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글, 누구냐 너
글이 대체 뭐길래 이런 힘을 가지는 걸까? 글이 대체 뭐길래 독자가 글쓴이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게 만들고, 더 나아가 독자의 생각을 바꾸는데까지 영향을 미칠까? 물론 글은 밝고 명랑한 감정을 생성해내는 역할만 하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의 글은 글쓴이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게 만들고 나 역시 그런 분노를 만들었던 적은 있다. 내 글을 통해 분노하고 나에게 분노를 털어내는 이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글이란 게 확실히 독자의 머리에 침투하기는 하는 거 같다.
하지만 작가가 그렇다고 만능인 건 아니다. 작가가 글을 써서 어떤 생각을 누군가의 머리에 침투를 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독자들은 글쓴이의 생각을 수용할지 말지 스스로 결정내린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사람일 수록 작가에 의해 쉽게 흔들리는 경향은 있겠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작가가 만능이라는 소리는 여전히 어불성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가 작가의 글을 읽고 작가에게 호감을 품는다면 그건 아마 자신과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혹은, 추상적으로 널부러져있는 생각의 파편들을 작가가 구체화해주면 그걸 고마워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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