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한공주>
이창동 감독의 <시>와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는 집단강간이라는 소재를 다룬다. <시>에선 한 아이가 집단강간당하고, 가해자들의 부모끼리 이 사태를 어떻게 '무마'할 건지에 대해 논의를 진행한다. 부모 그룹에 포함된 포함된 가해자의 할머니 한 명이 그들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것들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집단과 개인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한공주>는 제목에서부터 영화의 관점이 노출되는데, 집단강간을 당한 피해자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녀가 범죄 피해를 당한 뒤 겪는 트라우마와 그녀를 대하는 사회의 폭력성을 더욱 겪하게 느끼기에 적절한 관점이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여성과 여성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심지어 피해자의 아버지조차) 일관적으로 목소리가 크고, 소리를 치고, 폭력적이고, 마초적이고 가해자를 돕거나 피해자를 감추기에 급급하다. 주인공을 돕는 남자 선생이 하나 있긴하지만, 그 선생 역시 그의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선 꽤나 꼰대같은 모습을 보인다.
학교로 찾아와 한공주를 괴롭히는 여성은 이 영화에서 여성이라기보다는 부모에 가깝다. 그들은 한공주를 보면서 울기도 한다. 한공주 때문에 자신의 착한 성범죄자 아들이 깜빵에서 썩게되었다고 탓하는 듯하다. 한공주는 죄인이 된 기분이다. 왜.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이쯤되면 이 영화는 애초에 남녀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한국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가혹한 지에 대한 이야기로 봐야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것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 내의 여성들도 피해자 여성-한공주를 돕지 않는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그녀를 버렸고, 다른 여성들도 그녀에게 이렇다할 도움을 주지 안(못)한다. (아들의 부탁으로) 그녀를 보살펴주던 여성도 그녀에게 적극적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표현되는 여성의 삶이, 아니,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이 그만큼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한공주와 같은 피해를 입은 여성은 자살을 했고, 불륜을 했다는 이유로 집단린치를 당한 여성도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아슬아슬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땐 타인을 도울 때 용기가 필요하다. 쟤를 도와주다간 나도 죽을 지 모르니까.
1차 폭력(집단강간), 2차 폭력(피해자에 대한 폭력)의 비중 문제
영화는 1차 폭력이 발생한 이후의 장면, 그러니까 2차 폭력이 진행중인 때부터 시작한다. 영화의 뒷부분으로 가면 1차 폭력이 발하게 된 경과를 꽤나 디테일하게 보여주는데, 이 부분은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한다.
큰 맥락에선 한공주가 살고 있는 처절한 삶에 1차 피해와 2차 피해가 모두 '지금'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성범죄 피해를 입은 여성 한공주의 삶"이라는 식으로 묶을 순 있지만, 그런 식으로는 영화가 너무 추상적이고 메세지도 불분명해진다.
한공주는 영화에서 "지금 바로 여기"를 살고 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 영화가 지적했어야했던 부분은 1차 폭력이라기보단 2차 폭력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영화는 1차 폭력을 과도하게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리고 그 폭력을 그녀의 친구들이 보고 함께 괴로워하게 만듦으로써 1차 폭력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위인지를 입증해내는 데는 성공해냈지만,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2차 폭력에 대한 이야기에 소홀해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1차 폭력에 디테일을 계속해서 넣음으로 인해 피해자가 계속 1차 폭력의 피해-과거에 얽매여있다는 인상을 줬다. 하지만 이는 제3자인 감독이나 작가의 판단일뿐, 그녀가 실제로 1차 폭력의 피해를 어떻게 겪어냈는 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이수진 감독의 의중이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다. 감독이 영화의 제목을 <한공주>라고 지은 이유는 그녀의 삶을 기억해주고, 또 추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녀를 통해 어떤 교훈을 전달하려하는 것은 '한공주'를 수단적으로 대하는 것일 것이고, 이는 거부감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감정과 메세지의 문제
<한공주>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운 파렴치한 행위이고, 그 행위들은 비판받아 마땅한 행위들이다. 그런데 해당 행위들을 슬픈 음악과 함께 감정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얻는 것이 무엇이 있을 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다. 이 비판은 영화 <도가니>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한공주가 해당 사건을 통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굳이 그 행위를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행위를 당하는 한공주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다고 해도 그 고통을 관객이 전이받을 뿐, 이렇다할 메세지로 전환되지 않는다. 한공주가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는 건 영화에 초반부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영화의 후반부에 와선 그 강도를 더욱 세게했을 뿐 내용적으론 이렇다할 전환이 없었고 메세지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고통'이라는 감정(?)만 무성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메세지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각각의 영화들은 메세지가 있는데, 이 영화는 한공주의 삶을 보여주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에 있어선 실패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영화를 보고 나는 '한공주가 괴로운 삶을 살았구나'라는 내용을 전달받았지만, 그 이상은 전달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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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 감독의 다음 작품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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