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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Oct 20. 2016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거야"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거야"

최근 우연히 만난, 그리고 처음 만난 교수가 내게 말했다.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거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가 전공과 무관한 길을 택했는데 그의 눈에는 내가 '남의 집'의 '크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어느정도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표현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일 수도 있다. 


난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이 더 커보여서 택한 걸까?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해봤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이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자뻑을 하며 살고있다. 교수의 눈엔 내가 '남의 집'이나 기웃거리는 놈으로 보였겠지만 말이다. 교수의 말이 내게는 적절치 못하더라도 표현 자체는 꽤나 멋지다고 생각한다.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거야' 확실히 그러하다. 남의 집이 커보이면 진다. 


사실은 내 집이 더 커서인가?

교수는 바둑을 언급하며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거야"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거야"라는 문장은 바둑이라는 게임의 속성에 속박될 수 밖에 없다. 바둑이라는 게임에서 "남의 집이 커보이면 바둑에 진다"라는 격언이 존재하는 이유는 나의 집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집이 크다고 생각하여 무리수를 놓고 결국 패배하는 경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격언은 확실히 승부가 나는 결판을 낼 때에는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격언이다. 괜히 욕심부리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어디 한 둘인가? 과유불급하지 않아야 나의 집은 상대의 집보다 클 수 있으며 그래야 상대보다 더 나은 결과-승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거야"라는 말 앞에는 "사실은 내 집이 더 크니까"라는 말이 생략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바둑이라는 게임은 '집의 크기'가 중요하다. 상대의 집보다 나의 집이 더 커야 이기는 게임이다. 그렇기에 바둑은 왠지 '나의 집'이 '남의 집'보다 커야할 것만 같은 강박을 준다. 그래야 이기기 때문이다. 그 교수가 내게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거야"라고만 말했으면 모를까, 그는 앞에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라고 했다. 그래서인가? 인생이 뭔가 집의 크기를 두고 경쟁하는 결투의 장이된 듯한 느낌이었다. 


바둑에서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 건 사실은 내 집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둑이라는 게임에서 벗어나 인생사로 돌아오면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 이유는 단순히 내 집이 더 크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인생에 반드시 '크기'로 인한 승리와 패배라는 프레임이 개입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집의 크기

한국은 정답사회다. "다르다"라는 말보단 "틀리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튀는 사람을 싫어해서 모나면 정맞는다라는 속담이 있는 나라다. 한국인들은 원체 눈치를 많이 보고, 남의 평가에 의존한다. 이는 일본인들의 성향과도 맞물리는데, 그래서인지 <미움받을 용기>가 일본에서 나오고 히트를 친 것은 별로 놀랍지 않고, 동일한 책이 한국에서 히트를 친 것도 쉽게 납득 가능하다. 눈치를 보는 민족에게 눈치를 보지 않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책이니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가져해볼 때, 한국인들이 정답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행복을 보장할거라고 어느정도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답은 바둑에서 크기에 대입될 수 있다. 그 정답을 채우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 


행복의 절대적 기준?

바둑에는 '집의 크기'라는 절대적 승리의 기준이 있다. 한편,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행복을 완성시키는 명확하며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는 지는 따져봐야할 문제다. 다짜고짜 사람들은 모두 다르므로 각자의 기준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돈의 '소유'가 행복을 담보한다는 흔한 주장은 비판받기 마련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돈이 행복을 보장할거라고 믿고, 실제로 어느정도의 부가 행복을 보장한다는 연구 결과(연구1)도 엄연히 존재한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경제 격주간지 포천은 최근 일정 규모 이상의 돈이 더 많은 행복감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기존 이론과 상반되는 연구 결과 나왔다고 소개했다. 

미시간 대학의 경제학자 저스틴 울퍼스와 벳시 스티븐슨 교수는 세계은행과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제공한 150개국 자료를 조사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돈이 많을수록 더 많은 행복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슈퍼리치'조차 돈이 많을수록 더 행복하게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 프린스턴 대학 경제학 교수인 앵거스 디튼과 노벨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의 2010년 연구결과에서는 소득이 많을수록 행복감도 올라가는 게 사실이지만 연간 소득 7만5000달러(약 8260만원)가 넘는 이들은 소득이 그 이상 증가해도 더 이상 행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학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한 번 더 이용하면 느끼는 만족이 준다는 이른바 '한계효용의 법칙'이다.

그러나 울퍼스 교수와 스틴븐슨 교수에 따르면 돈이 많을수록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는 "돈을 많이 벌면 옆집 보다 멋진 자동차를 살 수 있다"는 등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사고방식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소득이 많아져도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포천은 돈으로 언제든 행복을 살 순 없지만 돈이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중요한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조사에서도 소득과 행복은 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따르면 미국의 1인당 연평균 소득은 3만7708달러로 OECD 34개국 평균 2만2287달러보다 많다. 이번 연구결과대로 미국은 OECD 회원국의 '행복지수'에서 상위권에 올랐다(연구1, 출처- 아시아 경제, 美최신 연구서 "돈으로 행복 살 수 있다" 결론)


더 나아가 돈의 쓰임새에 따라 행복도가 달라진다는 연구도 있다. 돈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것보다 여행 티켓 등을 통해 경험을 구매하는 것이 돈을 통한 행복 효용이 높다는 이야기다. 


교수가 내게 "남의 집이 더 커보이면 지는거야"라고 말했을 때 그는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요즘 이 업계는 하향세고, 직장 못구하는 사람도 많아. 월급도 작고." 그러니까 교수가 말한 "집"은 "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그 교수는 내가 전공 분야가 아닌 교수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 발을 들이밀려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 나름의 걱정 혹은 돈을 보고 이 업계에 접근하는 속물을 가지 치려했던 거겠지.


돈, 돈, 돈

내게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사고 싶은 물건이 많다거나, 남들에게 보일 굿즈 등이 필요해서는 아니다. 난 내 만족을 위해 물건을 구매하는 편인데, 그나마도 요즘엔 미니멀리스트 놀이한답시고 줄이고 있다. 그럼에도 돈에 갈증이 있는 이유는, 내가 지금 그 흔한 인간구실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와 동갑이거나 혹은 나보다 어린 친구들은 이미 기반을 잡아서 몇천만원씩을 저축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 이렇다할 직업이 없다보니 고정적인 수입이 없으니 통ㅈ. 가끔 언론사에 글을 기고하면 몇푼을 받긴하지만, 그나마도 액수를 밝히면 "헤에에에에에에에에에? 그것밖에 못받아요?"할 정도로 작다. 이 나라에선 글이 그리 비싸지 않다.


나는 돈벌이를 한 명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의무라고 보기 때문에, 적어도 스스로에겐 그걸 요구한다, 돈을 추구한다. 어느정도의 자격지심도 여기에 개입하는 거 같기는 하다. 돈벌이가 시작되면 금방 해소될 종류의 자격지심이라 그리 심각하게 보고 있지는 않다.


글을 쓰다보니 생각이 정리되며 또 한번 확신하게 되는데, 나는 교수의 말처럼 그 업계의 집이 커보여서 거길 지원한 건 아닌 거 같다. 내가 원하는 사이즈의 부는 어느 업계를 가건 얻을 수 있다. 다만, 일을 즐겁게할 수 있는 지, 그 일 자체가 의미있는 지가 중요하다. 일이 즐겁지 않을 거 같다고 생각해서 지원하지 않은 기업들이 대부분이고, 일 자체가 의미없는 것이란 판단이서서-더 정확하게는 나의 존재가 속했던 조직에 딱히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서서-한 단체에 들어갔다가 곧장 나왔던 일도 있었다. 어떤 이에겐  얼마나 더 돈을 주는 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인생사는 바둑이랑 많이 다르다. '크기'만 가지고 논하기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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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박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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