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읽고 있는 글은 최근에 ㅍㅍㅅㅅ에 기고하여 이슈가 되었던 위 링크의 글에 대한 후속글이다. 선조님들은 말하셨다. 물이 들어오면 저으라고. 해당 글에서 나는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들이 음악 등으로 감정을 떠먹여주려고 하는 한국 특유의 연출을 다뤘다. 이 전의 글이 현상을 다뤘다면 이 글은 왜 한국에서 유독 이런 설명충 현상이 두드러지는 지 그 이유를 다룬다.
사실 이런 건 비단 영화와 드라마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예능들의 연출들을 보아하면 설명들이 어마무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D들은 쉬지 않고 무언가를 떠먹여주려고 한다.
PD들은 "자막"과 "음악"으로 설명한다.
나는 한국 예능들을 볼 때 자막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여러분도 해보시라. 얘네가 얼마나 자막으로 영상들을 범벅하는 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의 예능들은 PD가 써내리는 자막들을 화면에 쉴 새 없이 보여준다. 예를 들어 당신이 아무 채널의 음악 프로그램이나 틀어서 음악이라도 들을라 치면 PD가 쉴새 없이 떠드는 것을 볼 수 있다.
환상적인 고음이라던가, 청아한 음색이라던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하모니라던가. 심지어 아무 소리도 안나면 "숨막히는 정적"이라고 또 조용하다는 걸 알려주려 한다. 얼마나 쉴 틈 없이 자막을 던지는 지 알겠는가? 소리가 없으면 소리가 없다는 것도 알려주려 한다니.
그리고 감동을 받으라는 듯이 울고있는 청중의 얼굴을 보여주기도 하고, 저 음색에 놀란 사람이 존재하는데 너도 알아야한다는 듯이 김구라를 갑자기 끼워넣으면서 김구라가 감탄하며 "어우"하는 사운드를 직접 넣기도 한다. 무대에서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데 김구라가 왠말인가? 감격하는 얼굴 보여주는 것도 거슬리는데 김구라의 "어우"가 왠말이냐고. 아래 링크를 클릭해보라.
(원본 영상을 구해다가 올리고 싶지만 웹상에선 찾을 수 없었다. KBS는 웹상에 올린 게시물 중 상당수를 한국에서 보지 못하게 해놨는데, 심지어 그 중에서도 알리가 부른 <고추잠자리>는 영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일단은 이 영상으로 대신하겠다)
<불후의 명곡>에 첫 출연한 알리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를 부르는 상황이다. 위 영상을 기준으로 1분 21초때 알리가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어우"하는 사운드가 들리는데, 그건 김구라가 감탄하는 소리다. 원본 영상에선 김구라의 얼굴도 삽입시켰다. 들을 때마다 빡이 치고 맥이 빠지는 김구라와 "어우"다. 대체 PD는 무슨 생각으로 "어우"를 넣은걸까? 김구라가 감탄했듯이 시청자 여러분들도 감탄하라는 의도일 것이다. 시트콤에 웃음 소리를 넣듯이 말이다. 계속 떠먹여주려는 거다.
난 음악만 듣고 싶은데 PD들은 도무지 언제 입을 닫아야하는 지를 모른다. 항상 뭔가 끼어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이건 현장에서 영혼을 걸고 노래하는 뮤지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카메라로 아티스트의 무대를 잘 보여주기만 하면 좋을텐데 왜 계속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는 걸까? 자신의 의도한 방향대로 시청자가 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제발 다른 식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줘, 랄까.
"농담"이라는 자막
흔한 예능들에서 패널 중에 한명이 농담이라고 할라치면 PD들은 말풍선에 그 말을 넣은 다음 거기에다가 "농담"이라고 입력한다. 마치 시청자들이 그게 농담인지 모를 거라 생각하는 듯 하다. 방금 문장에서 여러분들은 직관적으로 뭔가를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 PD들은 시청자들이 그게 "농담"이란 걸 모를까봐 "농담"이라 적은 게 아니라는 걸 여러분은 느끼셨을 거다. 글쟁이의 여러 역할 중 하나는 이런 미묘한 느낌을 글로 풀어내는 것에 있다.
여러분이 미묘한 느낌을 받은 이유는 PD가 특정 패널의 말을 굳이 "농담"이라고 했을 때, 그 의도가 어떤 면피를 위한 것이라 보기 때문일 것이다. PD들이 모든 농담에 대해서 "농담"이란 꼬리표를 자막으로 붙이는 건 아니다. 농담이기는 한데 뭔가 네티즌들이나 시청자들에게 욕을 먹을 빌미가 있거나 SNL KOREA가 흔히 풍자거리로 삼는 소위 프로불편러들이 문제제기할만한 껀덕지가 있을 때, 하지만 그럼에도 통편집하기에는 미묘한 수준이거나 그 장면을 편집하면 앞뒤를 자연스럽게 이을 수가 없어 잘라낼 수가 없을 때 PD는 "농담"이라는 설명-말꼬리를 붙인다. 일종의 면피책인 것이다.
필자는 연출자들이 설명하는 이유의 근간에는 오해받고 싶지 않다는 어떤 감정, 나의 의도는 이러한 것이니 내가 의도한대로 내 작품을 봐달라는 어떤 바람이 담겨있다고 본다. 한국의 드라마들이 어떤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줄 때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웅장한 음악을 매번 띄우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충격적인 장면인데 충격적이지 않으면 어떡하지하는 걱정 때문에 음악을 넣는 것이다. 물론 해당 장면을 더욱 극대화하려는 바람도 있기야하겠지만.
한국에 작가주의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상의 관객이나 시청자의 반응만 생각하고 작품을 하니 천편일률적인 작품만 나오고, 감정 과잉 작품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일본 콘텐츠와 설명충
일본의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이런 설명충 증상이 더욱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두 인물이 전투를 벌인다고 가정해보자. 갑과 을이 싸움을 벌일 때는 아마 각자만의 전략이 있을 것이다. 주로 이 때는 두 인물의 싸움을 관찰하는 구경꾼들이 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구경꾼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자-작가의 신묘한 기운을 받아 무엇이건 눈치 채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재능을 겸비했다. 구경꾼들 다수가 방금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을 보며 "어어??? 무슨 일이 벌어진거야? 저거 봤어?"라며 영문을 몰라할 때, 놀랍고 신비로운 재능을 겸비한 어떤 구경꾼은 여유롭게 상황을 해설해준다. "갑의 이러저러한 공격을 을이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막아냈어." 그러면 그 말을 듣던 구경꾼들은 감탄한다.
여러분의 역할은 작가에 의해 정해졌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수많은 구경꾼 중 한 명이다. 여러분은 그 해설가의 해설을 유심히 들어야하고, 주위의 다른 구경꾼들처럼 감탄해야한다.
상황을 해설해주는 캐릭터는 일본 콘텐츠에 특히 많다. 아예 이런 역할을 대놓고 부여받은 캐릭터도 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로버트 E.O 스피드웨건이다. 해설가 캐릭터로 워낙 유명해서 페이스북에서 "스피드웨건"으로 가계정 만들어서 설명충 컨셉으로 노는 유저들도 있을 정도다. 이 캐릭터도 한국 PD들처럼 도무지 언제 입을 닫아야하는 지를 모른다. 그는 어떤 캐릭터의 행동이나 현 상황을 계속해서 설명해준다. 작가는 이 스피드웨건을 통해서 해설을 하는 것이다. 아래 영상을 클릭해 감상해보시라.
집단주의, 눈치 보는 문화, 설명충
여기까지 잘 따라오셨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나의 띠오리다. 나는 일본의 설명충 연출이 일본의 집단주의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국민들은 어떤 나라보다도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정답사회라고 비판하는데, 나는 일본이 한국보다 더 심한 정답사회라고 생각한다. 정답사회란,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고, 그것 외의 것은 오답으로 보는 사회를 말한다. 즉, 정답사회는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다. 집단을 위해 엇나가는 개인을 희생시키는 사회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 자들은 왕따를 당하거나, 낙인이 찍히거나, 비난을 받거나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때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사회에 사는 자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인들에게 설명해내야한다. 자신의 의도가 이렇다는 것을 누군가들에게 끊임없이 설명해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의 특유의 환경이 있기에 일본에서 하루키를 누르고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이고,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엄청난 성적을 거두며 <미움받을 용기>가 42주가 넘게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움받을 용기>의 흥행은 일본과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우린 타인의 평가들을 감당해낼 용기가 필요한 사회를 살고있는 거다. 나는 해당 책이 유럽에서는 절대 흥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유럽에선 중년 아재도 시뻘건 면바지 입고 산책을 다닌다. 그는 그 바지를 입고나오면서 누군가에게 자신이 왜 하필 눈에 튀는 그런 색상의 바지를 골랐는 지 누군가에게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고, 솔까 아무도 아재가 어떤 바지를 입었는 지는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에 갔을 때는 한 여성이 지하철에서 민소매를 나시를 입은 채로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때 그의 겨드랑이 털이 수북하게 보였다. 이런 광경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가능할까?
눈치를 많이 주는 사회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할 때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고, 그렇기에 타인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어필하려 한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무엇을 하기 때문에 자존감이 대체로 낮고 배짱이 없다. 그럴만도 한 게 배짱이라도 부릴라고 치면-개인 특유의 성질을 다수에게 드러낼라치면, 다수의 이름으로 한 사람을 '넌 비정상이야'라며 깔아뭉게기 때문이다. 다소 남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한국의 아티스트 가인이나 한 때 f(x)에 속해있던 설리에 대한 이상하리만치 가열찬 공격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쉬어가는 타임으로 일본의 한 광고를 보자. "좋은 여자가 되자"라고 말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좋은 여자"가 되기 위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단순히 아름다워기를 바라는 것은 한 때 여성들이 노출 패션 셀카를 찍어 올리면서 함께 올렸던 태그 #기분이_조크든요 에서처럼 스스로 만족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한 남자나 여러 남자들에게 좋은 여자가 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위의 영상에 함의된 것처럼 연애를 하기 위해, 남자에게 선택을 받기 위해 좋은 여자가 되어야한다는 발상은 일본이나 한국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과 한국이 비슷한 수준으로 여성을 차별해서인 것도 있겠지만, 타인의 평가를 통해 스스로를 확인받는 문화적(?) 습성에도 많은 부분이 기인할 것이다.
각각의 개성이 없는 한국 영상들의 연출
한국 연출가들의 연출들이 감정 과잉이 된 이유는 연출가들이 자신의 어떤 작품에 대한 작가론을 유지하기에 까다로운 사회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감해질 수 없는 사회에 속해있다보니 작가로서 자신의 연출론을 확립하기보다는 남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방식, 즉, 이미 흥행 방식이 어느 정도 확인되어 리스크가 최소화된 어떤 연출방식에 점차 의존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영상물들이 예능, 드라마, 영화 할 것 없이 비슷해진 것이 아닐까 한다. 감정 과잉 콘텐츠가 많아진 것은 한국인들이 워낙 감정에 충만해있어서 다들 그런 콘텐츠에 몸이 쏠려서일 것이고.
비슷하지만 다른 양상으로 일본은 '나'의 주장을 남들 앞에서 펴지 않는 특유의 문화가 있기 때문인지 영화나 드라마들도 워낙 조용조용한 것들 투성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와중에도 설명은 멈추질 않는 게 또 특징이라면 특징이란 거다. 일본 영화들을 보면 상황을 설명해주는 해설가들이 대부분 등장한다. 주인공이 화자가 되어서 상황을 설명해주기도 하고, 주인공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해설을 해주기도 한다.
"팔리니까 그렇게 만드는 거 아님?"이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팔리는 것들의 모습들이 하나같이 일관적이라면 그건 이상한 거다. 모든 영상물들은 개인들의 창작물이기에 각자의 개성이 조금씩이라도 묻어나는 게 정상이다. 더 나아가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들도 얼마든지 팔릴 수 있음에도 "팔리니까 그렇게 만드는 거 아님?"이라고 하면 현상에 일부만 보는 것이고 또 그런 현상을 옹호해주는 것이라고 밖에.
2015년 3월에 쓴 글
-
브런치 구독은 사랑입니다.
-
커피 기프티콘 후원받습니다. 카톡- funder2000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사랑입니다.
문의- funder2012@gmail.com
-
작가 페이스북
작가 트위터
작가 유튜브
글쟁이 박현우
헬조선 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