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현우 Aug 04. 2017

'나'를 파괴시키는 연애의 한 종류


그 연애를 시작한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그때 내가 그 연애를 시작한 이유로 외로움을 든다. 장기화된 외로움, '나는 혼자고, 혼자일 것이다'라는 강한 확신은 서서히 나를 파먹었다. 삶을 회색빛으로 보기 시작했고, 꿈도 희망도 잃어갔다. 썩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삶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나니 삶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색다른 글들을 많이 쓸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연애 후 이별 뒤에 쓴 글들이 연애칼럼 형식으로 배출되었듯, 나의 오랜 우울도 글로 배출되었다.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 어떤 의사가 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조울증의 '조'와 '울'에 해당하는 녀석들은 상당히 강단이 있어서 글로 아무리 놈들을 배출하려해도 쉽사리 빠져나가지 않았다. 글로 일부를 배출해도 원소스는 그대로 몸에 남겨져 있어서 또 비슷한 앙금을 만들어냈다.


그러던 찰나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얼마 안가서 헤어졌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다 생략하고 하나만 말하자면 그는 내가 '나'로 존재하게 어렵게 만들었다. 그 사람은 내가 혼자 시간을 가지는 것을 견디질 못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내가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을 견디질 못했다. 그녀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하는 사람이었고 애인이라면 마땅히 자신과 계속 같이 있어야한다는 믿음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짧다면 짧은 기간을 사귀었는데 그 사이에 만나지 않은 날이 없고 내가 '내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면 자신을 심하게 밀어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Trust issue가 있기도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가 계속 시야각 안에 있기를 바랬다. 아마 누군가의 부재는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연애 초장기엔 거의 매일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나며 그녀의 템포에 맞췄고 나도 꽤나 그것을 즐겼으나, 점차 내가 글을 쓰지 못하고 있고, 내 개인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있단 자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을 요구했으나, 이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요구를 하자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혼자있길 바라는 나를 인정하지 못했고, 나 역시 항상 함께있어야한다는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짧다면 짧은 연애 기간 동안 이별 통보를 서너번은 받았다.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나는 일단 그녀를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가 내게 끼칠 어떤 위험을 방지하고자 하는 방어기제가 아니었나 싶다. 이별을 하지 않으면 현상유지고 현상유지는 내 심리 상태를 불안정하게 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방어기제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에서 관계를 그만두는 방식으로.


그 관계 이후부터 연애에 대해 몇가지 새로운 생각들을 하게됐다. 하나는 외로울 때는 연애를 시작하지 않겠다는 것. 외로움은 사람을 둔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단점을 간과하고 장점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만든다. 그게 사랑이 기능하는 하나의 작동방식이라고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땐 상대의 무엇이 커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그건 연애가 시작되고 유지되는 상황에서의 이야기고, 시작 전에는 냉정한 눈으로 상대와 내가 정말 맞는 조합이 될지를 따져봐야한다. 안맞는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소거해야한다. 외롭다는 이유로 나중에 헤어지면 된다는 이유로 무작정 시작하는 건 끝이 좋지 않다. 시작이 사소한 치기였다 하더라도 이별은 뼈아프니까.


둘째로,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자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개인은 단순히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를 말하지는 않는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념의 노예가 아닌 자, 특정 이념에 대한 증오나 혐오가 강하지 않고 대상을 대상 그 자체로 보는 자, 자의식이 충만해서 타인이 개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자를 모두 포함한다.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다. 에고-자의식이 충만한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 자신감이 충만하고-야망이 높고 비판에 취약하고 남들에 대한 존중을 할 줄을 모르고 자기객관화가 안된다. 사회 생활하면 흔히 만날 수 있는 게 이런 부류다. 개인주의자를 찾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전설의 포켓몬같달까. 정말 간혹가다가 만날 수 있다. 나도 아직 그런 존재가 못 되었다. 다만, 방향은 잡았다. 수양은 끝이 없다.

-

커피 기프티콘 후원받습니다. 

카톡- funder2000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사랑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카페, 내 앞에서 다투는 남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