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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Sep 04. 2017

<우리의 20세기>: 이토록 섬세한 영화!

#브런치무비패스


스포 주의

원제는 <20세기 여성> 
한국에 수입된 제목은 <우리의 20세기>

영화의 주인공은 20세기, 그리고 20세기를 산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21세기를 살아갈 사람들이다. 제목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보자. 원제는 <20th century women>인데, 한국에는 <우리의 20세기>로 번역되었다. 이는 영화의 타겟 범위를 넓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제목에 "여성"이 들어가면 여성들만 영화를 보러와서 장사가 덜 될 거라 생각한 것 같은데, 글쎄, 어떤 영화는 타겟 범위를 좁힐 때 더욱 폭발력을 발휘한다. 


특히나 "여성"이 대놓고 쓰여있는 제목에서, 그리고 영화에서도 페미니즘을 적지 않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는 상황에서 제목의 "여성"을 뺐을 때 여성계의 반발을 사서 오히려 관객이 줄어들 수도 있다. 흥행 이런 걸 다 떠나서 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감독이 박아넣은 제목을 이렇게 멋대로 바꿔놓는 걸 보는 건 개운한 경험이 아니다. 한 두번이냐만은. 


생존과 삶 사이


수입된 제목에 대한 나의 불만은 사소한 것이고, 영화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마이크 밀스 감독은 20세기를 살아있는 것 마냥 고증해냈고, 20세기를 살아간 사람들을 아주 잘 살려냈고, 그들과 21세기를 살아갈 사람들 간의 갈등도 생생히 그려냈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20세기를 살아왔던 주인공 엄마와 21세기를 살아갈 아들 간의 관계였다.


아들은 엄마를 "대공황 세대"라 표현하고, 엄마는 아들이 철이 없다 생각한다. 엄마로 대표되는 20세기를 살아오고 20세기와 동시에 생을 마감할(흥미롭게도 주인공 엄마는 1999년에 사망한다) 대공황 세대는 삶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들에게 삶은 살아내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인 시기를 살아왔으니 그들에게 있어"나는 행복한가" 따위의 질문은 사치다. 그런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삶이니까.


하지만 20세기의 막바지에 청춘을 보내고 또 21세기를 살아갈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들은 삶을 다르게 대한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 고민하고, 삶에 어떤 향을 담아낼 지 고민한다. 자신의 삶이 어떤 것인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 여성은 자신의 물건들-속옷, 사진, 신발 등-을 촬영하고, 또 기교는 좋지 않지만 어떤 감성을 담아내고 있는 음악에 심취한다. 



엘르 페닝은 여기에서 줄리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줄리는 자기파괴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이는 대공황 세대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어떤 경향이다. 왜 살아야하는 지 질문을 던지지 않으니 삶이 괴로울 리도 없고,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대공황 세대와 달리 삶에 대한 질문이 허용된 줄리 세대에게 삶은 고통 그 자체다. 그에게 삶은 버텨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자와 술로 자기를 파괴한다. 남자와 술로 얻어낸 어떤 쾌락과 고통은 삶 자체가 발생시키는 고통을 잊게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중반에 줄리는 '강인함'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좋은 덕목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가 스스로를 얼마나 유약한 존재로 보고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엄마는 행복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엄마 도로시의 대답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니야." 또 허용되지 않는 질문이 있다. "엄마는 안 외로워?". 그따위 질문은 대공황 세대에게 사치인 것이고, 그따위 질문을 허용치 않을 때 삶을 버텨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질문을 멈추고 삶(?)에 집중할 수 밖에 없던 시기를 살던 사람들이니까. 


이 영화는 미국의 20세기를 다루지만, 영화의 통찰은 한국의 20세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보릿고개를 지내던 20세기를 살던 자들은 삶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그저 살아냈다. 그들은 그렇게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나름의 성과도 얻어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몇십년을 살아온 20세기의 사람들은 21세기의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킨다. 디테일한 내용은 미국의 그것과 다를지 모르지만 양식은 유사하다. 왜 너희는 우리처럼 살지를 않니?


이 영화를 내가 좋아하게된 이유는 어느 한쪽에게 비난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세대간의 갈등을 다룰 때 흔히 영화들은 한 쪽 편에 서서 한쪽을 찬양하고 다른 쪽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고는 하는데, 이 영화는 두 세대 모두에게 존중의 시선을 보낸다. 살아온 자들은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앞으로 살아갈 자들은 새롭게 세상에 적응할 것이다.


아들은 페미니즘 서적에 감화가 되어 한 문구를 그의 엄마 도로시에게 읽어준다. 페미니즘 서적의 문구들은 20세기를 살아온, 혹은 영화가 상정하는 '현재'까지 살아온 여성들을 상정하며 그들의 삶이 왜 불행한 것이었는지를 조곤조곤 분석해낸다. 그 문장은 관람객인 내 입장에서 꽤나 그럴듯한 것으로 읽혔다. 그리고 아들이 그 문장을 마무리했을 때 도로시가 그 문장에 동의할 거라 기대했다. 문장이 마무리되었을 때 듣고있던 도로시는 아들에게 묻는다. "그걸 왜 나한테 읽어주니?", "관심있어하실 거 같아서요.", "그런 걸 읽으면 너가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니?"


이 영화가 유치한 길을 걷고자했다면 도로시는 어떤 페미니즘 문장을 들었을 때 뒷통수를 맞은 표정을 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식의 연출은 현실성이 없다. 도로시는 페미니즘 서적이 묘사하는 그런 식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어떤 책이 간단히 규정내리는 것을 허용할 생각도 없다. 20세기를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한다. 즉, 지조가 있다. 21세기를 살아갈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따뜻한 영화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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