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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Sep 08. 2017

넷플릭스 <집시>: 군더더기 없는 불륜 스릴러의 완성

<집시>, <언페이스풀> 스포 주의


불륜 스릴러
<Gypsy>


<Gypsy>(이하 <집시>)는 불륜 스릴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장르가 무엇을 통해 스릴을 만들어내고 또 재미를 만들 수 있는 지를 훌륭히 잘 보여줬다. 같은 류로는 <unfaithful 언페이스풀>(2002)(이하 <언페이스풀>이 있다. 바람을 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릴을 영화적 재미로 풀어내는 것에 탁월한 작품이다.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빌런을 때려잡는 것을 목표로 둔다면, 불륜 스릴러의 주인공은 바람을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으면서도 성공적으로 상대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고 어떤 목표를 수행해야한다는 점에서 스파이 장르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Unfaithful>


<언페이스풀>은 드라마 <집시>와 달리 영화다. 그리고 영화로서 이 영화는 불륜 스릴러를 더 없이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다만, <언페이스풀>은 결국에 누구 하나를 죽게 만들면서 끝난다. 연출하는 입장에서 살인을 통해 인간의 극단성을 보여주는 것은 쉽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보통 하지 않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달라붙어서 소재로 활용될 수 있는 '살인'이지만, 그런 수단인만큼 <언페이스풀>에선 스토리를 다소 왜곡시킨다. 살인이 일어나는 순간 불륜은 별로 중요치 않은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불륜을 다루려고 했던 게 아니라 여보자기가 왠 섹시한 젊은 남자랑 바람핀 것을 두고 빡치는 남성을 다루려고 했던 거라면 살인도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뻔한 스토리와 뻔한 감정에 어떤 매력이 있나? (<언페이스풀>의 비판할 구석은 이것 뿐이다. 명작이니 아직 안 본 분들은 꼭 보시라. 한국 넷플릭스에 업로드되어있다)



<집시>는 드라마이고, 영화와는 다른 전략을 택해야한다. 영화는 짧게는 1시간 30분에서 길게는 2~3시간 내에 스토리를 끝내야하지만, 넷플릭스 드라마는 최소 8시간에서 13시간 이상의 시간 동안 흥미를 유지해야한다. 이 드라마는 그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인물들의 심리를 관찰하게끔 한다. 한 여성이 한 여성에게 호감을 가지고, 결국 일탈을 하게되는 이유를 설득력있게 보여낸다. 설득력있단 말은 주인공의 행위가 너무도 설명이 잘되어있어서 "재 왜 저러냐?"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남편이 아닌 자를 욕망하기까지, 그리고 두 사람이 하나가 되기까지의 심리 묘사가 딥하고 시적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 진 할로웨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스릴러라는 장르를 완성한다. 불륜을 걸리지 않기 위한, 불륜을 더 성공적(?)으로 하기 위한 주인공의 각종 전략(?)과 음모(?)까지 더해지면 어느새 똥줄이 타게 된다. 이걸 보던 친구는 쫄려서 보다가 말았다고 한다. 정작 사람을 죽이거나 하는 건 1도 없는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불륜으로 이어지다.

이 드라마에서 불륜은 자유를 추구하는 행위에 가깝다. gypsy는 특정 민족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방랑 생활하는 자들을 부를 때 쓰이기도 하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gypsy는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 정작 이 드라마에서 집시라는 단어는 한번도 언급되진 않는다. 내가 놓친 것일 수도 있으나 드라마 제목 외에선 집시란 단어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진 할로웨이는 얽매이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결혼 생활 역시 그에겐 고통이다. 그를 얽매는 건 결혼 뿐만이 아니다. 여성인 그는 한 여성에게 이끌리는데, 여성을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 역시 일종의 족쇄로 기능한다. 드라마 초반에 그가 여성-시드니에게 소극적인 이유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잠시 그의 딸 이야기를 해보자. 그의 딸 역시 흔한 딸들처럼 굴지 않는다. 짧은 머리를 하려고 하고, 남자 애들처럼 뛰논다. 딸은 자신이 여성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남성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남성, 여성이란 개념도 따지고보면 '어른의 사정' 따라 나뉜 카테고리에 불과하니 딸이 스스로를 남성이나 여성의 카테고리에 넣지 않는다고 뭐라할 수 없다. 딸은 남성처럼 구는 게 아니다. 그냥 하고싶은대로 할 따름이다.


진은 한 카페의 바리스타에게 한 눈에 반해버린 상황이기에 딸을 어떻게 다뤄줘야할 지 감을 잡지 못한다. 딸이 지금처럼 남성처럼(?) 살게 할 것인지, 아니면 딸이니 여성처럼(?) 살게 할 것인지 주인공은 고민한다. 딸의 지속적인 요구 중 하나는 머리를 짧게 자르겠다는 것인데, 이는 아마 딸을 더 남성처럼(?)보이게 할 것이다. 결국 그는 딸에게 흔히 남자애들이 하는 숏컷을 하게 허용을 해준다. 이는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해 확신을 했다는 신호다. 딸에게 숏컷을 허용한 뒤 그는 바리스타와 더 애정행각을 벌인다. 


불륜을 옹호하나?

(불륜을 옹호하는 드라마도 얼마든지 성립 가능하다. 이 부분은 이 드라마에 대한 혹시 모를 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드라마를 더 설명하기 위한 부분에 불과하다)


<집시>가 불륜을 옹호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주인공은 드라마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다. 심리상담가이지만 그는 환자들의 삶을 조종하고, 환자들의 가족들과 친분을 가지며 가족과 환자의 관계를 더 멀게 만들어지게도 한다.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시드니라는 여성은 심지어 자신에게 상담을 받는 남성이 주기적으로 언급하는-환자가 사랑하는 여성이다. 주인공은 여성에게 반한 뒤 그와 남성을 떼어놓으려 한다. 지 밖에 모르는 흔한 이기주의자다.


더군다나 시드니와 관계를 가질 때 진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엉뚱한 신분을 상대에게 전해주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짓말만 한다. 마지막화에서 진이 심리학자로서,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신분으로 학교에서 발표를 할 때 시드니가 진의 발표 모습을 본다. 진은 강당에 들어온 시드니를 확인하고 한동안 눈빛을 던지는데, 그 때 진 할로웨이의 눈빛은 악마의 그것과 닮아있다.


만약 이 드라마 불륜을 옹호하려했다면 주인공이 지속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게 두지도 않았을 것이고, 주인공에게 해피엔딩을 선물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적어도 1시즌은 해피 엔딩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오히려 주인공은 불륜을 통해 자기파괴적인 길을 걷고 있다.


그럼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가? 그렇다고 보기도 힘들다. 어디에 가만히 속박되지 못하는 강박을 가지고 있는 집시의 삶을 보여줄 뿐이다. 진 할로웨이는 이 드라마에서도 그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 그저 철저한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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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즌으로 스토리가 완결되지 않았기에 2시즌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확정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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