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내가 정치 이슈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는 정치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는 것 뿐이다. 그런데 전역을 한 뒤에 언제부턴가 정치 이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정확한 계기는 떠오르지 않는다. 조금씩 빡침을 주는 이슈를 접하다보니 정치 이슈에 일종의 중독이 된 건 아닌가 싶다. 정말 이쪽 계통은 문제가 끊이질 않거든(끊임없는 자극이랄까).
재밌는 건 문제가 생기긴하는데 문제가 봉합되지도 않고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와서 기존의 문제를 덮는 식으로 온갖 문제들이 날뛴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국정원의 대국민 도청 이슈는 김무성 사위의 마약 이슈로 덮어지고, 김무성 사위 마약 이슈는 반기문 이슈로 덮여지고, 반기문 이슈는 국정교과서로 또 덮인다. 하지만 정작 깔금하게 해소되었다고 볼만한 이슈는 단 하나도 없다. 계속계속 축적이 된다. 보상은 없는 데 빡침은 계속 더해진다.
나는 미약한 발언권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지껄여봤는데, 딱히 어떤 문제가 해결된 적은 없으며, 문제가 해결되는 계기를 만들지도 못했다.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한다. 나는 이 노력을 "노오력"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확실히 나는 내 목숨을 걸고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 위치에선 노력의 한계가 있기는 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에서 발언권은 간판과 무관하지 않다. 하다못해 정치 평론을 해도 정치평론가가 아닌 "변호사"를 불러오는 게 헬조선 스타일 아니던가. 대체 왜 변호사를 부르는겨?
나보다 발언권이 강한 온갖 언론들이 줴치면 상황은 차라리 낫다. 언론들이 줴치는 건 내가 줴치는 것보다는 좀 더 효과적이며, 대중의 시선을 특정 문제에 집중시키는 것에는 효과가 있고, 여론을 통해 이슈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는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언론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느정도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그런데 이것도 모든 언론사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를 들어 조중동과 한경오프, 뉴스타파, 시사인 등은 영향력이 있지만, 그외에 언론들은 딱히 나와 입장이 다르지 않다. 그들은 무언가를 바꾸는 데에 있어 딱히 영향력이 없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
나는 목적을 이루려는 어떤 솔루션이 실제로 실효성을 담보받지 못한다면 그것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성매매에 있어 완전한 금지주의가 아닌 구매자만 처벌하는 스위스 모델의 제한적인 금지주의를 지지한다. 완전한 금지주의가 실제로 성매매를 줄이는 데 전혀 효과적이지 못하며 또한 인신매매를 통해, 혹은 경제적 열악함에 의해 성매매를 하는 자들까지 피해자로 몰기 때문이다. 나는 법인세 인하를 통한 투자 촉진 솔루션 또한 지지하지 않는다. 법인세 인하를 통해서 실제로 기업들의 투자 촉진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떤 여성에게 무작정 고백하는 친구를 말리는데 주저함이 없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상호간의 암묵적 합의를 전제한 뒤에 해야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에 무작정 고백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효과가 없는 것을 지지할 생각이 없다. 이렇게 글을 써보니 내가 지독한 실용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나의 관심은 딱히 무언가를 바꾸는 데 실효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줄이려는 노력은 꽤나 오래 되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며 실제로 나의 행동이 무언가를 바꾸는 것에 효과가 없다는 생각이 들고나서부터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나를 분노케했고, 나의 에너지를 소모하게 했고, 분노를 주게 한 특정 사건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이러는 사이에 나는 내 주위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주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나를 멀리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나'와 멀리 있는 것을 바꾸려는 노력은 성과를 못보고, '나'와 가까이 있는 존재들에 상처를 주게된 것.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내가 하는 정치적 표현이 마음에 안들어서 내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에게 표를 준 누군가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건 꽤나 충격적이었는데, 난 내 정치적 표현으로 영향을 받아서 내가 좋아하는 후보를 찍었다는 사람은 단 한명도 듣지 못했는데, 정작 내가 싫어하는 후보를 찍은 사람의 실존 여부를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정치 드립으로 인해 내가 지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표를 준 사람이 있다는 것. 얼마나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표를 자신의 정의(justice)와 무관하게 누군가가 싫다는 이유로 남발한 자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멍청한거지 사실.
여유가 없어서 이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 언론사에 들어가면 나는 누구 못지 않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글을 쏟아낼 것이다. 그게 직업이기도 하거니와 좀 더 삶에 여유가 생길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은 딱히 여유가 없거든. 저 멀리까지 관심을 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