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구청역은 예정에 없었다
나는 주로 5호선을 타면 왕십리를 간다. 그리고 내가 지하철을 타는 곳에서 왕십리를 갈 때는 대략 20분 정도가 걸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왕십리가 아니라 홍대를 가려고 했다. 어플을 찍어보니 왕십리 방향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간 뒤에 공덕에서 환승해서 홍대를 가는 게 빠르더라. 그런데 습관이 무섭긴 무서운 거더라. 나는 나도 모르게 왕십리로 가는 플랫폼 앞에 있었다. 그래서 '늙었나...'를 속으로 속삭이며 반대편으로 갔다. 왕십리 반대편으로 가는 지하철이 와서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습관이 무섭긴 무서운 거더라. 나도 모르게 왕십리를 간다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지하철에 앉아있었던거다. 그래서 영등포구청역에 도착했을 때 내렸다.
혹시 모르니까
딱히 홍대에 약속이 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홍대에서 한번도 안가본 카페를 찾아가보려고 했다. 일종의 모험을 해보려고 했던 거지. 굳이 홍대를 찾아가려고 했던 것은 그 곳에 아무래도 좋은 카페가 많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2~30대가 많이 모이는 곳이니까 신선한 컨셉의 카페들도 많고 맛이 좋은 카페들도 많다. 그래서 영등포구청역에서 내릴 때 2호선으로 갈아탄 뒤에 다시 홍대로 갈까 하는 생각도 하긴했다. 그런데 애초에 '모험'을 하려던 것이었으니 홍대든 영등포구청이든 상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등포구청역 근처에도 괜찮은 카페가 있을지도 모르잖는가?
영등포구청역을 나온 뒤에 만난 카페
영등포구청에서 나온 뒤에 몇십분을 돌아다녔다. 영등포구청 역 앞에는 탐탐이 있었고, 더 돌아다니니까 아리스타 커피가 나왔다. 그 외에도 여러 카페가 있었는데 들어가지 않았다. 중년 아저씨들이 카페 테라스에서 커피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들 때문에 내가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돌렸기 때문이다.
아제들은 커피 맛에 별로 신경쓰지 않으니까 그들이 커피를 마시는 곳의 커피는 맛이 훌륭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했던 것 같다. 그들은 술 맛은 기가막히게 알아볼 것 같지만 커피는 맛이 있건 없건 딱히 신경쓰지 않을 것 같다. 이건 그들의 옷차림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이 빵모자를 쓰고, 이태리 할배들처럼 옷을 입었으면 나는 그들을 달리 봤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나의 착각일 수 있다. 알고보니 그 아제들이 전국의 모든 카페들을 돌며 커피 맛을 비교하시는 분들일지도 모르는 일이다(그렇다쳐도 그들의 미각이 훌륭하다는 게 담보되진 않지만). 대표성 휴리스틱-시각적 신호는 강력하다. 하지만 틀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곰식's cafe에 들어가다
이 카페를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카페엔 중년 아제들이 없었으며, 프랜차이즈가 아니었고('모험'이 목적이라 프랜차이즈는 피했다), 카페 이름이 이뻤으며, 간판이 근처에 있는 다른 영등포구청역 근처 카페보다 젊은 느낌이었다. 다른 간판들은 탐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딱히 프랜차이즈도 아닌데 탐탐과 비슷한 간판을 달고 있었다. 프랜차이즈처럼 보이려는 나름의 노력인 것 같기도 한데, 나는 그 간판들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메리카노의 가격
아메리카노의 가격은 괜춘하다. 2500원이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500원이 추가되서 3000원이 된다. 근처의 다른 카페들은 어떤 가격으로 커피를 파는 지 몰라서 "영등포구청역 카페들 중에서 가격은 괜찮은 편이다"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대학 앞이 아닌 이상 2500원에 아메리카노를 주는 건 결코 비싼 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메리카노가 쓰다
나는 커피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고, 맛있는 커피를 하는 집을 찾기 위해 적지 않은 카페들을 돌아다니며 많은 커피들을 마셨다. 그래서 확실히 커피를 쓰게 만드는 카페들의 커피를 마시면 "쓰다"라고 말할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쓰지 않게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집도 있다. 이것은 물론 나의 기준일 뿐이다. 다른 이들은 내가 "쓰다"라고 하는 커피를 "쓰지않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쨋거나 내가 곰식's cafe 에서 마신 아메리카노는 내 기준에 "썼다". 이것은 "깊다"라거나 "진하다"라는 말과는 무관하다. 결코 깊지도 않았고 진하지도 않았다. 다만, 곰식's cafe의 커피를 "진하진 않았지만 썼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쓴 커피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겐 좋은 카페일 수도 있겠다.
머그컵을 안주고 일회용 컵을 준다. 테이크아웃잔에 줄지 머그컵이 줄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자리를 잡는 다른 손님들을 봐도 다 일회용컵을 쓰고 있다. 머그컵을 설거지할 때 쓰는 세재와 물 값보다 테이크아웃잔이 더 싸게 먹히는건가? 가뜩이나 쪼들리는 소규모 카페들은 머그컵을 쓰는 게 더 수지타산이 맞을 것 같은데 말이지.
화장실은 남녀공용
이 카페에는 화장실이 하나다. 하지만 프랜차이즈도 아닌 카페에 남녀 각각의 화장실이 없다고 비판하고 싶진 않다. 헬조선이 괜히 헬조선인가. 뉴스타파에 따르면 임대료도 감당못해서 방을 비우는 자영업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까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이 따로 없는 건 이 카페의 잘못이 아니다. 이 카페에 남녀 각각의 화장실이 없는 것은 카페 사장님의 잘못이 아니라 이 건물 주인의 잘못이 더욱 클 것이고, 더 나아가 임대료를 '졸라' 올리는 데도 이를 방관하고 있는 행정부의 책임이 더 클 것이다. 남녀가 같은 화장실을 쓰게 만들고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 글은 즐거운 맛집탐방글인데 어쩌다가 다큐가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