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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Oct 18. 2015

언제 불행해지는가?

나의 중심을 잃을 때

Rothko


'나'를 찾는다, 라는 말의 의미

흔히들 하는 말들이 있다. "나를 찾으러 인도로 여행을 떠난다"거나 "나를 잃은 것 같다"라는 말. 나는 한 때 이 말이 의미하는 진정한 의미를 몰랐다. 그러다가 어떤 현명한 분을 만나서 2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 뒤에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되었다.


이 말은 나의 꿈이나 인정욕구와 관련이 있다. 내 꿈이 '이 곳'에 있는데 '저 곳'에서 딴짓을 한다면 '나'를 잃을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데 나에게 전혀 관심도 없는 엉뚱한 곳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알랑방귀를 뀌고 있으면 그 때도 '나'를 잃을 것이다. 아마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잃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찾으러 인도에 간다거나, 태국에 간다거나 일본에 간다거나 하는 식의 '여행 힐링'은 '나'를 찾는 것과는 딱히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런 여행은 현실을 잠깐 벗어나는 것을 통해 일시적 기쁨을 주는 것일 따름이다. 인도에 '나'는 없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청소 안해서 머리털 휘날리는 더러운 방 구석에서도 '나'를 찾는 것은 가능하다. 애초에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언제 불행해지는가?

분명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음에도 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를 잃는다. 이 말은 직업에 대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특정 직업을 가지지 않고서도 원하는 일을 하는 방법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업에서도 그렇고, 직업 외의 현실 속에서도 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 '나'를 잃게되고 이때 우리는 허무감을 느끼게 된다. 인생이 '노잼'이 되는 것.


현대 미술의 회화 작가를 꿈꾸던 청년이 생각보다 좋은 수능 성적이 나와서 떠밀리듯 서울대 의대를 지원하는 경우, 그 선택은 헬조선의 현실상 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최악의 선택일 수도 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레지를 거치고 개업을 한 뒤에 많은 돈을 벌어서 원하는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경제적 지위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잠재적 불안과 불행을 끌어안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방 한 구석에 캔버스를 두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한다면, 그는 전보다 충만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식으로 말하자면 그의 '창작 섬'에 불이켜지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할 때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할 때, '나'를 잃는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헬조선의 현실상 합리적인 것일 수도 있다. 조선은 능력보다 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비합리적인 현실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이 굉장히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면, 국회의원 아빠를 둔 취준생보다 취업을 빠르게 할 수 없을 것이고 더 좋은 기업에 갈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국회의원 아빠를 둔 취준생과 스펙이 비슷하다면 당신은 그 취준생을 이길 수 없다. 이게 조선의 현실이다. 국회의원의 문자 한통, 전화 한통이 취업을 성공시켜준다. 이는 음모론이 아니라 기사화도 될 정도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더이상 중국의 꽌시 문화를 비판할 수 없게되었다. 국회의원 아빠가 없더라도 '노오력'을 통해 힘있는 사람과 친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이 아니더라도 특정 회사의 임원급과 친해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현실을 다들 어느 정도 알고 알거나 느끼고 있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특정사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침묵을 선택하고, 새해나 추석이되면 연락처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삿말을 돌린다. 그런 식으로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나는 이런 것도 삶을 사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며, 이런식의 삶이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가장 나은 방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단,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나'를 잃진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그렇다. 그가 연락처의 사람들에게 인삿말을 돌리는 것을 진정으로 즐기고, 거기에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면 인삿말을 돌리는 행위 그 자체는 굉장히 건강한 행위라고 본다. 하지만 인사를 돌리는 과정이 괴롭다면,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헤친다면 이는 결코 건강한 행위라고 볼 수 없다.


헬조선의 비합리적인 정 문화를 감안하더라도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나의 친구들을 넘어서 자신이 속해있는 여러 조직들에게까지 과도한 애정을 주고, 또 과도한 애정을 바라는 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이상적인 나'를 상상한 뒤의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게 되면 '나'의 삶은 결코 존중받을 만한 것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삶이나 존중받을 만한 것이기에 나의 삶을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며, 확고부동한 구라에 가깝다. 모든 삶은 존중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다시, '나'를 찾는다는 것

중심을 잡는 게 우선이다. '나'를 가치있게 해주는 것은 '나'에게 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나'가 가치가 없게되는 것도 아니고, 노벨문학상을 못탄다고 고은의 시가 가치없는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리움 미술관에 걸려있지 않다고 여자친구가 그려준 그림이 리움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들보다 가치 없게 되는 것도 아니다. 역으로, 타인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우리가 '더' 존귀한 존재가 되지도 않으며, 노벨문학상을 받는다고 고은의 시의 가치가 급상승하는 것도 아니고, 리움 미술관에 걸려있다고 해서 그 작품의 가치가 급격하게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작품은 홍라희에 의해 선택받았을 따름이다(물론 가격은 올라가겠지).


나의 가치를 매기는 잣대를 바깥에 많이 세우게 될 때, 즉 타인의 사랑을 척도로 삼거나 타인의 인정으로 척도를 삼게될 때, 나의 가치는 불안정해지고 리스키(risky)해진다. 타인의 사랑이나 타인의 인정은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여자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슬퍼해서도 안되고, 저놈보다 월급을 적게받는다고 위축될 필요도 없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나'를 지켜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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