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인공들
-회색지대
모든 작품들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어디에 일방적으로 소속이 되지 않은 캐릭터들이다. <붉은 돼지>의 돼지는 인간도 아니고 가축도 아니다. 그리고 해군도 아니면서 해적도 아니다. 돼지는 해군에도 쫒겨다니고, 해적에게도 쫒겨다닌다. 하지만 돼지는 해적을 소탕하며 해군에 도움되는 일을 하기도 하고, 해적을 도우면서 때로는 해적에 우호적인 행동들도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센도 마찬가지로 어디에 일방적으로 속해있지 않다. 그녀는 인간이긴 하지만 귀신의 세계에도 속해있다. 이러한 중간자적 성격은 귀신의 세계에서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돼지가 된 그녀의 부모들을 볼 때 더욱 도드라진다. 소녀가 사랑에 빠진 그 용가리도 일방적으로 귀신의 세계에만 속해있다. 주인공인 그녀 혼자만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양쪽에 걸쳐 있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작품들의 주인공들도 대체로 중간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그 놈도 그렇고 <토토로>의 아이들도 그렇고. 그런데 이 글의 주인공은 <모노노케히메>이므로 굳이 일일이 다 다루지는 않겠다.
<모노노케히메>
-자연 vs 인간
<붉은 돼지>에 해군과 해적이 있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인간 세계와 귀신 세계가 있다면 <모노노케히메>에는 자연과 인간이 있다. '자연'은 자연세계를 침범해오는 인간을 증오하며, 자연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인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멧돼지들이 가장 공격적이며, 멧돼지들보다는 온건하지만 모노노케히메-원령 공주 산과 늑대들도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인간과 함께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도 '자연'에 적대적이긴 마찬가지다. 인간이 살기 위해선 '자연'에 침범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자연'에 속하는 동물들을 물리치고, 또 쳐들어오는 동물들로부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철을 제련하고 총을 개발한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이를 박박 가는 상황이다.
이 둘 사이에는 '사슴 닮은 신'이 있고, '신 머리 먹고 영생을 누리려는 황제'가 있다. 그런데 이 둘은 '자연'이나 '인간'과 달리 어떤 '종족 보존'같은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행위하는 존재들은 아니다. 두 존재는 자연이나 인간에 속해서 행위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개인적인 욕망이나 원칙에 의해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존재들은 자연이나 인간이 소멸하는 상태가 와도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는다. 자연이나 인간의 생사는 신과 황제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슴 닮은 신'과 '신 머리 먹고 영생을 누리려는 황제' 외에도 자연과 인간 사이에 위치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가 바로 <모노노케히메>의 주인공이면서, 이 글의 주인공인 아시타카다.
아시타카는 어떻게 회색지대에 들어가는가?
아시타카는 인간이긴 하지만, 순수한(?) 인간은 아니다. 저주 걸린 멧돼지를 잡다가 한쪽 팔이 저주에 걸렸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짐승이고 괴물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외모나 능력으로나 아시타카는 <붉은 돼지>의 '돼지'와 비슷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중간자의 위치에 처하는 것이다.
행동을 보아도 그는 어느 한쪽에 속해있지 않다. '자연'에게 가서는 그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싸우지마!'라고 한다. 그래서 늑대와 멧돼지 등 '자연'은 아시타카에게 "이 인간놈의 새끼!"라며 적대시한다. 그런데 아시타카는 '인간'들에게 가서도 '싸우지마'라고 한다. 전쟁을 옹호하는 인간들도 아시타카를 적대시한다. 아시타카는 한쪽편에 서지 않았기에 결국 모두의 적이 된다. <붉은 돼지>의 '돼지'처럼 모두에게 적대시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아시타카의 흉터가 의미하는 것
아시타카에게 흉터가 생긴 것은 '우연'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 자연의 일이나 인간의 일이나 남의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전투로 인해 저주걸린 멧돼지가 아시타카가 사는 동네에 쳐들어왔으며, 그 돼지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아시타카는 저주에 걸리게 되고, 아시타카는 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저주를 풀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자연과 인간의 싸움에 개입하게 되고 결국 깔끔하게(?) 그 둘의 싸움을 끝내는 것에 일조하게 된다. 싸움이 끝나자 아시타카는 저주에서 풀린다.
그럼 그 저주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에게 인간도 동물도 아니게 만드는 '저주'를 내린 것은 아시타카를 '중간자'의 입장에 놓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쟁은 한쪽에 속해있지 않은 자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한쪽에 소속되어있는 자들은 다들 옹고집이니까)
이렇게 보면 아시타카가 걸린 저주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시타카에게 선사하는 나름의 동기부여인 동시에 의무감일 수 있다. 자연과 인간 간의 전쟁이 끝나자 말끔하게 사라진 저주를 보면 이런 해석은 더욱 딴딴해진다. 아시타카가 저주가 걸렸음에도 집 안에서 끙끙 앓았다면 전쟁은 끝나지 않고 저주도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전쟁이 더욱 확장되어 아시타카가 사는 마을에까지 닿았을 것이다. 저주걸린 멧돼지가 쳐들어온 건 그저 시작일 뿐.
<붉은 돼지>의 돼지와 아시타카는 어떻게 다른가?
<붉은 돼지>의 돼지가 '방관'한다면 아시타카는 '개입'한다. '돼지'는 해군이나 해적이 뭔 짓을 하건 간에 별로 게의치 않는다. 현상금이 걸리면 밥벌이를 위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용병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아시타카는 자연과 인간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그들의 행동을 바꾸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두 인물 모두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인공들 답게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에서는 통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안한다면 적이다!"
자연과 인간은 모두 아시타카를 적대시한다. 하지만 그가 정말 그들의 적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는 그저 평화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모노노케히메>에서 자연과 인간은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다', '나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면 적이다', 라는 마인드로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시타카는 평화를 주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더 많은 죽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전쟁을 주장하는 자연과 인간에 동조할 수 없다. 전쟁은 해답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을 주장하는 이들 입장에서 반대자는 곧 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시타카 자연에게서나 인간에게서나 소외된다.
<모노노케히메>에서 아시타카가 결국 해내는 것
-결말이 의미하는 것
최인훈 <광장>의 그 아제가 "중립국!"을 외치는 것처럼 아시타카는 계속 "평화!"를 외친다. 그리고 그는 결국 그것을 소소하게나마 이뤄낸다. 이 과정에서 희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연에 속하는 수많은 동물들이 죽었으며, 많은 인간들도 죽었다. 또한, 자연은 자신들이 의지했던 '신'과 늑대 엄마 모로를 잃었고, 인간을 대표하는 총 잘 쏘는 누나는 한쪽 팔을 잃는다.
하지만 '피'를 통해 얻은 게 없진 않다. 모노노케히메인 늑대 소녀 산은 인간을 극혐했지만 아시타카를 통해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긴다. 아시타카에 대한 이성적인 사랑이 인간에 대한 호감으로까지 나갈 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총 잘 쏘는 누나-에보시도 비슷한 말을 남기며 자연에 대한 전쟁을 보류한다.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 간의 전쟁은 중단 혹은 유보되며 나름의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는 것'에서 그리고 '현재진행 중인 전쟁'을 멈췄다는 것에서 아시타카의 노력은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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