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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여행기 3일 차

2020.8.16.

by 해피엔드

일곱 시에 깼다. 모닝 맥주 마시며 여행기를 정리했다. 여덟 시. 친구들이 하나 둘 눈을 뜬다.

야. 오늘 뭐해?
물놀이하기로 했잖아.

첫 일정이 물놀이라서 다들 대충 씻기로 했다. 켠진팡배 순으로 씻었다.

진아. 나 렌즈 끼는 법 좀 알려줘. 물 들어갈 거니깐.
오케이. 어렵지 않지.

켠은 렌즈를 한 번도 안 껴보았단다. 렌즈를 오른손 중지 끝에 올려주고 왼쪽 눈에 넣어보도록 하였으나 실패. 자꾸 결정적 순간에 눈을 감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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켠아. 니가 그렇게 겁을 먹어버리면 넣을 수가 없어. 렌즈는 아프지 않아. 그러니까 자 눈을 크게 뜨고!

심리 요법을 적용해 보았으나 역시 실패.

봐봐. 내가 끼는 걸 보여줄게.

시범을 보이고 따라 해 보라 했지만 당연히 실패. 그동안 팡이 씻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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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아. 너도 이리 와봐. 켠 렌즈 좀 껴보자.

아예 내가 강제로 켠 눈을 벌리고, 그때 팡이 잽싸게 넣어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 반사적으로 감기는 눈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켠은 그냥 안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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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시계방향 드라이브. 거북바위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었다. 학포 가는 길목에 있는 울릉 커피밴에서 커피와 베이컨피자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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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장거리 여행이니 하루하루를 즐겨.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지는 말고.

팡이 메뉴판 옆에 있는 문구를 찍어와 보여주며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우리 중에 누구 캐리어가 가장 큰가 생각해봤다. 켠이다. 켠은 요즘 회사 일이 많고 피곤하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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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금방 나왔는데, 피자가 오래 걸렸다. 화덕에 구운 피자. 서울에서 먹던 맛과 비슷했다.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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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학포 가서 스노클링 할 차례. 프리다이빙 강사과정 막바지인 배는 서울에서부터 본인 장비를 다 챙겨 왔다. 켠진은 마스크, 스노클, 핀을 빌렸다. 팡은 여기에다 구명동의를 추가로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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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참 맑았다. 바닥까지 잘 보였다. 파도는 잠잠했고 수심은 적당히 깊었다. 사람도 붐비지 않았다. 물놀이 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배는 돌고래처럼 수시로 잠수했다. 나도 배를 흉내 내며 몇 차례 잠수했다. 켠은 우리가 잠수하는 걸 촬영했다. 혼자 구명동의를 입은 팡은, 구명동의 하지 않은 배켠진의 안전을 계속해서 걱정했다.

두 시간 반 동안 물에 있다 나왔다. 손끝에 감각이 없고 몸이 떨린다. 배가 고프고 잠이 온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빈 정자에서 함께 위스키를 마셨다. 허기가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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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으러 이동하던 중에, 길가에 독도새우 전문점이 나왔다. 어제 못 먹은 독도새우. 당장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독도새우 돼요?
예 됩니다.

독도새우 3~4인분 15만 원. 팔팔한 새우가 스무 마리 정도 나왔다. 닭벼슬같은 수염이 옆으로 난 닭새우와, 새우깡 모델인 꽃새우. 여기에 도화새우까지 하면 독도새우 3종인데, 오늘은 도화새우는 없었다. 종업원이 시범 삼아 몇 마리를 꺼내서 직접 머리를 떼고 껍질을 까서 주었다. 이렇게 신선한 새우 회는 처음이었다. 켠팡배 모두 너무 맛있다며 환호했는데, 내 입엔 잘 소독된 수돗물 맛이 났다. 차라리 바삭한 머리 튀김이 내 취향엔 더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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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일정은 행남해안산책로 트래킹. 도동항에 차를 대고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한쪽은 끝없는 바다가, 다른 한쪽은 당장이라도 돌이 떨어질 것만 같은 절벽이 펼쳐졌다. 여기가 한국이 맞나? 싶은 풍경. 파도소리 들리는 해안길을 다 걸으니, 갑자기 매미소리 새소리 들리는 산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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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초입의 철수네 쉼터에서 식혜 한 잔. 산 중턱 전망 좋은 곳에서 사진 한 장, 꼭대기 등대에 있는 전망대에서 또 사진 한 장. 잠시 쉬었다가 다시 돌아 내려왔다. 곳곳에서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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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도동항. 다음 목적지인 나리분지로 가기 전에 일단 오징어 먹물빵, 호박빵, 호떡을 샀다. 셋 다 진짜 울릉도 특산품이다. 저녁 먹고 오면 늦어서 못 사니까 미리 사두었다.

나리분지는 꽤 멀었다. 섬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북쪽까지 간 다음에, 섬 중앙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한참을 오르니 분지가 나왔다. 생각보다 넓었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강릉에서 울릉도로 오는 동안 산 넘고 물 건너 시골에 왔다 생각했는데, 거기서 산을 한번 더 넘는 시골이 또 있었다. 유배지로 이만한 곳이 있을까.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나리촌식당에 차를 대고 내렸다. 우리가 여기 온 이유. 메뉴판을 보며 뭘 시킬지 고민하자, 일하는 아줌마가 도와주셨다.

그냥 산채정식시키면 다 나와요.
오삼불고기도요?
아니 그건 미리 예약해야 되지. 그거 빼곤 다 나와요.
아, 그러면 산채정식 네 개랑 씨껍데기술 주세요.

배켠팡진은 모두 고기를 좋아한다. 3년 넘게 같이 놀러 다녔지만, 나물로만 이루어진 산채정식은 처음 먹어본다. 열여섯 가지 반찬이 모두 나물. 동물성 단백질은 그 흔한 계란하나 없었다. 그런데 어쩜 이리 맛이 좋을까. 다들 쌀한톨 안 남기고 싹싹 긁어먹었다. 씨껍데기술도 물론 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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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다 먹고 카드를 내미는데, 켠이 식당 벽면에 적힌 글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 진아. 저기 벽에 쓰여진 글. 니 스타일이야.

벽에 쓰여진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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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촌
부부가 사는 이야기

1990년 울릉도가 고향인 친구가 자기 오빠를 한번 소개시켜준다고 해서 만나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어요.
그 해 봄에 무작정 따라나선 울릉도.

포항에서 배를 타고 8시간 동안 배 멀미로 고생고생해서
도동에 도착한 순간 아~! 속았구나 했죠.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더군요.
도동에서 다시 저동으로 넘어가서 또 다시 배를 타고 차로 갈아타고
끝도 없는 고개를 구불구불 넘어서 나리분지라는 곳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지금 남편이 목욕하는 선녀 옷 훔쳐놓은 것처럼 안심을 하더군요.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나이 25살에 나리분지로 들어와서 육지로 나간다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큰아들은 지금 군복무 중이고
딸은 육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이제 우리 부부 둘만 남았어요.
울릉도에 와서 보낸 겨울만 이미 20번이 넘었네요.
이제는 육지로 나가자고 해도 못나가요.

그거 아세요?
울릉도 사람들이 육지 나가면 멀미하는 거!
울릉도가 내 집이고 내 고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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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사연이 엄청 감동적이네요.
에이, 감동적이긴! 자기가 남자 인물 보고 반해서 결혼했으면서. 저기 저 끝에 아저씨가 사장님이고 그 옆에가 사모님이야.

카드 영수증을 받으며 내가 말하자, 계산하던 아줌마가 식당 구석의 단체손님 테이블을 가리키며 소릴 높였다. 다른 손님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년의 부부가 그 소릴 듣고는 고갤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보며 웃으시더니, 아예 우리한테 오셔서는, 가져가서 먹으라며 강냉이를 싸주셨다. 두 분의 인상이 너무 좋았다. 감동 파괴가 아닌 감동 증폭이었다. 저 부부에게, 나리분지는 격오지도 유배지도 아닌 천국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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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도동항으로 왔다. 뭘 할까 고민하다 디저트를 먹기로 했다. 번화가를 둘러보며 좀 힙해 보이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이레 커피. 커피와 빙수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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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돌아갈 거 생각하니 벌써 아쉽다.
아니야. 아쉬워하지 마. 지나간 과거 후회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 두려워하지 마. 현재에 충실해.

팡이 미리부터 아쉬워하길래, 그러지 말라고 한마디 했더니 곧바로 팡이 말하길

라고 팡에게 말했다.라고 여행기에 적어줘.

그러자 배가

야 니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각자 할 일이나 잘해~라고 배가 말했다고 여행기에 적어줘.

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여행기를 신경 쓰며 자꾸 이래라저래라 한다. 하지만 어차피 내 맘대로 쓸 거다. 글 안에선 작가가 신이다.

커피와 빙수가 나왔다. 커피는 무난하게 맛있었고, 빙수는 기대 이상이었다.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의 눈꽃빙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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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가기 전, 안주삼아 오징어회를 떠갈 곳이 없을까 다녀보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대로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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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며 씻었다. 켠은 수중에서 찍은 동영상을 배에게 보여주었다. 팡은 술을 정렬해놓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여행기를 썼다. 그렇게 각자 볼일을 본 뒤 함께 술을 마셨다. 자영업과 서비스와 서울과 지방의 차이와 관광객과 매너와 학군과 부동산과 주식과 암호화폐와 미래예측과 후회와 행복과…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눴다. 많이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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