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15.
번갈아가며 깨고 다시 잠들길 반복하다 여덟 시에 다 같이 일어났다. 팡 먼저 한 시간 동안 씻고, 이어서 켠진배 합해서 한 시간 동안 씻었다. 사람은 넷인데 욕실이 하나라서 씻는데만 두 시간이 걸린다.
배가 고프다. 어제 사둔 컵라면이 있지만 다들 멀미할까 두려워 참기로 했다. 쟈뎅 커피만 마셨다. 연필심 같고 맛있었다.
야 근데 너희들 마스크 어느 쪽으로 써야 하는지는 아냐?
켠이 자신의 마스크를 내밀며 물었다. 마스크에 상표조차 붙어있지 않아 앞뒤가 쉬이 구분되지 않았다. 팡진배가 각각 답을 제시했으나 공교롭게 셋 다 틀렸다.
마스크를 펼쳤을 때 바깥쪽에서 접히는 부분이 이렇게 아래로 향하면, 거기에 먼지가 쌓일 거 아니야? 그래서 바깥쪽 접히는 부분이 위로 향하도록, 이렇게 쓰는 거야. 오케이?
켠의 설명이 워낙 명쾌해서 팡진배는 바로 이해했다. 회사 일도 많아 피곤한 와중에 마스크 쓰는 법까지 잘 숙지한 켠. 하지만 팡은 상표가 붙어있어 앞뒤가 잘 구분되는 마스크를 쓴다. 나는 반대로는 쓸래야 쓸 수 없는 kf94 마스크를 쓴다. 배는 어차피 자기 맘대로 쓸 것이다.
배 타러 갈 시간. 주차장까지 갔다가, 놓고 나온 물건이 생각나 배와 함께 다시 숙소로 들어왔다. 각자 물건을 챙기는 와중에 배가 뭔가를 발견했다. 신분증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켠의 지갑.
아 켠 지갑 놓고 갔어 ㅋㅋㅋㅋㅋㅋ 신분증 없으면 배 못 타는데 ㅋㅋㅋㅋㅋㅋ
둘이 한참 웃었다. 배의 가방에 켠 지갑을 넣고, 나가서 차에 탔다. 여객터미널 앞에 와서야 켠은 자신이 지갑을 놓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아 맞다. 나 지갑 놓고 왔는데? 신분증도.
아. 뭐야. 신분증 없으면 배 못 타는 거 몰라?
배의 연기가 능청스럽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숙소 다녀올까? 아... 근데 시간이 간당간당하네. 야 나 늦으면 나 빼고 너네 셋이라도 다녀와라.
켠아. 그러지 말고, 내가 너 배 타게 해 주면 얼마 줄래? 나 사실 방법을 알고 있거든.
그래? 알았어. 2만 원 줄게. 뭔데?
야. 2만 원은 너무 싸다. 방금 배 포기하려던 놈이.
알았어. 그럼 5만 원. 빨리, 뭔데?
배가 가방에서 켠의 지갑을 꺼냈다. 켠은 한참 동안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혼자 구석에 가서 담배를 피웠다. 그러고는 농담했던 5만 원을 대신해 멀미약을 쐈다. 켠은 요즘 회사 일이 많아서 피곤하다.
오늘은 75주년 광복절. 올여름 여행지는 팡이 선정했다. 어차피 코로나로 해외여행도 못 가는데, 광복절 맞춰서 독도에 가는 건 어떻겠냐고. 좋은 생각이었다. 애국심이 고취되는 여행. 다만 독도에서 폼나게 휘날릴만한 커다란 태극기를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선착장 앞에서도 팔긴 파는데, 다 작은 것뿐이었다.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샀다.
승선. 배는 11시에 출발했다. 바다는 고요했다. 다들 잠들었다. 나도 곧 잤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셔터 소리에 깼다. 12시 35분. 창 밖으로 섬이 보인다. 독도다. 가파른 바위섬 위에 작은 구조물들이 지어져 있다. 오. 저기에 가보는 건가?
아니었다. 배는 독도까지 완전히 가서 닿지 않고, 독도 가까이에서 멈췄다. 곧이어 갑판에서 사진을 찍으라는 안내가 나왔다. 갑판은 도떼기시장 같았다. 독도와 우리가 함께 담긴 사진을 가까스로 찍었다. 태극기도 흔들어 보았지만 우리 얼굴을 너무 가려서 사진에 함께 담기는 어려웠다. 큰 태극기 안 챙겨 오길 다행이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도 들어가지 못하다니. 독도 땅을 밟아보려면 얼마나 운이 좋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바글바글한 사람들 틈에서 어찌어찌 셔터를 눌러대길 20분 정도. 들어가서 자리에 앉으라는 승무원의 안내가 이어졌다. 독도 포토타임, 끝. 자리에 앉으니 멀미약 부작용 덕분에 실망할 겨를도 없이 잠들었다.
울릉도에 돌아오니 세 시. 배에서 내려 밥 먹으러 가는 동안 켠은 여자친구와 영상통화를 했다. 아마 평소 회사에서 바삐 일하는 중에도, 틈날 때마다 이렇게 영통으로 소식을 전했으리라. 다정한 사랑꾼.
따개비칼국수 먹기 위해 방문한 태양식당과 명가가 모두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그렇다면 아예 태양식당 본점으로. 울릉도 해변을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끝없는 바다와 깎아지른 절벽이 쉴 새 없이 펼쳐졌다. 어떤 길들은 왕복 1차선이어서 반대방향 차가 다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진입해야 했다. 들뜬 기분 덕분인지, 이 불편함조차 신기했다. 20분쯤 달려 태양식당 본점 도착.
따개비 칼국수 네 개랑 오징어숙회 하나 주세요.
문득 생각해보니 이틀째 따개비를 먹는데 따개비가 뭔지 모르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물었다.
근데 따개비가 뭐야? 그 바닷가 가면 붙어있는 그거야?
아냐. 그건 육지에서 부르는 따개빈데, 먹는 게 아니야. 울릉도에서는 작은 전복같이 생긴 삿갓조개를 따개비라 불러.
와.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전에 왔을 때 찾아봤지.
배가 답했다. 배는 모르는 게 없다.
오징어숙회는 무침처럼 나왔다. 도시에서 먹던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개비칼국수는 걸쭉한 국물 안에 녹색 면과 따개비, 미역, 감자, 호박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켠은 감격했다.
미역은 탱탱하고 나물은 향긋해. 오징어는 쫄깃하고. 칼국수 호로록 먹으면 매콤한 게 땡기는데, 오징어가 그걸 딱 채워준다.
응. 그래서 이거 먹으면 저거 먹고 싶고, 저거 먹으면 다시 요게 먹고 싶고 그러네.
팡이 맞장구쳤다. 다들 그릇 바닥이 보이도록 먹었다.
밥 먹고 계속 드라이브. 울릉도에는 산이 많아 길이 구불구불하고, 노면 또한 거칠어서 멀미가 나기 쉽다. 그러나 바다와 산이 너무 예뻐서 드라이브할 가치는 충분하다. 학포에서 커피 한 잔씩 하고, 호박엿 공장에서 호박엿을 시식했다. 코스모스 리조트에 있는 카페 울라에서 사진을 찍었다. 차를 타고 계속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카 오디오로 90년대 노래를 틀고 따라 불렀다.
길가의 특산물 직판장에 울릉도 호박막걸리가 써 붙어 있었다. 그동안 식당 갈 때마다 주문했지만, 동이 나서 먹어보지 못한 술이다. 여긴 혹시 있을까 해서 차를 세웠는데… 놀랍게도 마지막 한 병이 남아있었다!
오 그럼 저희가 살게요. 종이컵 네 개 주세요.
잔뜩 기대한 마음으로 잔을 부딪혔지만 결과는 실망. 호박 맛도 안 나고 그냥 별 맛이 없었다. 먹어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섬을 한 바퀴 다 돌아 다시 저동항. 저녁으로 독도새우 먹으러 천금수산에 갔지만 줄이 너무 길어 포기했다. 이미 일곱 시 반. 울릉도에선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갈만한 다른 식당이 없었다.
안 되겠다. 치킨이나 먹자. 울릉도 하면 치킨이지.
그래. 거기에 컵라면도. 울릉도 컵라면 유명하잖아.
젤리도 먹자. 울릉도 하리보 맛있다던데?
참 긍정적인 친구들이다.
울릉도 치킨 맛집 마루통닭(치킨마루가 아니다)은 도동항 쪽에 있다. 도동항은 저동항과 달리 완전 핫플이었다. 작은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가보았다. 난타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공연팀. 공연은 어설펐지만 관객들은 충분히 흥겨워하고 있었다. 보기 좋았다.
마루통닭에서 마늘통닭과 양반후반을 사고, 편의점에서 하리보와 컵라면을 비롯한 군것질거리를 샀다. 숙소에 돌아와 치킨을 뜯고 카발란을 마시며 남은 기간 동안의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4박 5일이나 머무르기엔 할 게 없어 보이던 울릉도가, 욕심을 부리니 할 게 너무 많아서 4박 5일로는 모자란 섬이었다. 세상사 참 마음먹기 나름이다.
점점 널브러진다. 오늘도 위스키 한 병을 다 마셨다. 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