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13.
여러 번 깼다. 벽간소음이 너무 커서, 복도에서 누가 말하면 연극 대사처럼 또박또박 귀에 와서 꽂혔다. 층간소음이 너무 커서, 위층에서 움직이면 천둥이 쳤다.
뭐야 이거. 싱가포르. 조용하고 깨끗한 선진국이라더니.
그러게. 우리가 서울에서 온 탓인가? 서울이 더 조용하고 깨끗한데?
그동안 너무 나약하게 살아왔나 봐 우리.
씻고 짐을 쌌다. 어제 마시고 남은 음료를 바꿔 마셨다. 체크아웃하고 택시를 탔다. 10분쯤 이동하니 고층 건물들이 나온다. 드디어 시내인가.
저 두리안 닮은 건물이 에스플러네이드래. 오페라하우스의 마이크를 본땄다는데… 오?
오? 오오오.
저 멀리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이 보여, 팡이 말을 멈췄다. 나도 감탄사가 나왔다. 사진으로만 보던 랜드마크를 처음 육안으로 보는 순간. 함께 오오~하며 코너를 도니 우리가 묵을 페닌슐라 호텔이 나왔다.
호텔은 좋았다. 로비 옆에 수영장이 보기에도 시원했다. 얼리 체크인이 가능해서, 방 안에 짐을 풀었다. 여러 모로 어제보다 쾌적하다.
진아 아침 먹어야지.
아침? 벌써 열한 시 오십 분인데? ㅋㅋㅋ 어쩌지. 바로 게부터 때릴까?
그럼 아침 같은 점심? 게는 저녁에 제대로 먹는 게 어때. 아점은 좀 개볍게~
팡의 노란 책을 보고 송파 바쿠테 본점으로 향했다. 구글 리뷰수만 봐도 실망할 수가 없는 집. 가는 길에 뷰가 좋아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신난다. 여기 횡단신호는 보행자가 버튼을 눌러야 작동을 한다. 멍하니 서서 기다리는 보행자들을 위해 우리가 버튼을 눌렀다. 보행자들이 우리 덕에 길을 건넜다. 신난다. 강을 건너다 고개를 돌리니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이 보인다. 신난다.
바쿠테는 한자로 육골차. 말 그대로 갈비탕이다. 대신 소갈비 아닌 돼지갈비. 줄은 길지 않았다. QR코드가 인쇄된 종이를 나눠주고 고객의 핸드폰을 통해 주문을 받는 시스템이 신기했다. 갈비탕 둘에 간장불고기 같은 요릴 하나 시켰다. 밥도 한 그릇 추가. 한국인 입맛에 아주 잘 맞았다. 깍두기까지 있었다면 더 좋았을 맛. 국물 두 번 리필받아먹었다.
밥 먹었으니 강변에서 커피 한 잔 하며 다음 일정 짜볼까?
콜~
강변의 바에서 커피를 마셨다. 강바람 부는 오후의 바는 몹시 여유로워, 왠지 유럽에 온 것만 같았다.
오늘은 마리나 베이 투어. 풀러턴 호텔이 보여 잠시 들렸다. 호텔 구경 겸 에어컨 쐴 겸. 풀러턴이 뭐 하던 사람인지 팡도 나도 몰랐기에 오래 있진 않았다. 검색해 보니 싱가포르 총독이란다.
조금 더 걸으니 머라이언 조각상이 나왔다. 머라이언이라는 동물이 따로 있었나 문득 생각했다. 가만 보니 지느러미가 있다.
머-라이언이 반 사자 반 물고기인 거지? 머-메이드처럼.
어 그렇지.
팡은 모르는 게 없다. 이런 친구 옆에 있으면 핑프가 된다. 함께 머라이언 주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을 배경으로, "나 싱가포르 가봤어!"라고 외치는 사진들. 이거 찍었으니 이제 싱가포르에서 할 일 다 했다.
다음은 두리안 빌딩. 서울로 치면 예술의 전당 같은 곳. 본래 이름인 에스플러네이드가 무슨 뜻인지 찾아보니 산책로, 둔치라는 뜻이다. 뭐야 왜 이렇게 어려워. 옥상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 팡이 슬러시 마시는 사람을 보았다길래 건물 내외를 다 둘러보았지만, 슬러시 파는 집은 없었다.
팡아 너 너무 더워서 신기루를 본 건 아니지?
어 아니야 진짜 확실히 슬러시였어.
슬러시집을 찾으며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마리나 베이 샌즈. 쇼핑몰이 아주 컸다. 푸드코트에 갔으나 슬러시 파는 곳은 없었다. 아쉬운 대로 과일 플래터를 사 먹었다. 모든 과일이 아주 달콤 시원했다. 그래도 슬러시를 잊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딘가 슬러시집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걷던 중 TWG가 나왔다.
진아. 홍차 한 잔 하고 갈래?
홍차? 음..
차갑게.
오 차갑게라면 고고.
갑자기 분위기 럭셔리. 홍차 종류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팡이 알아서 사과차와 레몬차를 시켰다. 홍차 향과 과일향이 아주 고급스럽게 어우러져, 다른 홍차 맛도 궁금케 만들었다. 왠지 근본적인 갈증을 해소시키는 맛이어서, 우리는 더 이상 슬러시를 찾지 않게 되었다.
드디어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지하 도착. 실내에 수로가 있고 배가 다녔다. 로비에 흔히 놓인 화분마저 별다른 크기로 손님을 압도하는 호텔. 고개를 들면 수십 층높이에 달하는 천정. 단언컨대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이야말로 싱가포르 최대 컨텐츠다.
로비 한 바퀴 돌고 전망대로 향했다. 세 고층 빌딩 위에 놓인 배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기대를 품고. 그러나 막상 올라가서의 느낌은 일반 고층빌딩에서의 느낌과 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어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렇지. 밑에서 볼 때랑은 다르지. 수영장이나 어떻게 생겼나 보려 했더니, 그쪽으로는 막혀 있어 갈 수 없었다. 그 막혀있는, 그래서 건너편을 바라만 볼 수 있는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마치 설국열차 꼬리칸 같아 재밌었다.
분명 돈 내고 올라와서 좋은 풍경 보는데 루저가 된 이 느낌 뭐지? ㅋㅋㅋ
그러게. 행복은 정말 상대적인 거라니까. ㅋㅋㅋㅋ
그 와중에 가든스 바이 더 베이가 위에서 보기에도 너무 예뻤다. 다음 목적지 당첨. 내려가서 보니 바로 옆이었다. 다 보기엔 너무 넓어서, 중앙의 슈퍼 트리로 직진했다. 하늘까지 쭉 뻗어있는 나무가 멀리서 보기엔 커다란 식물 같아 신비로웠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저 평범한 인공 구조물이었다. 가장 큰 구조물 아래서 사진을 찍고 나왔다.
저녁 시간. 택시를 타고 팜 비치 씨 푸드 레스토랑으로.
이렇게 배고플 때 게 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완전 게맛있게~
이런 드립을 치며 갔는데 예약이 가득 차서 입장할 수 없었다. 나라면 그러려니 하고 나왔을 것을 팡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빗물 떨어지는 날씨 봐서는 분명 예약 취소 건 생길 테니 연락 달라고(영어). 팡의 이런 적극적인 태도는 참 배울만한 부분이다. 번호를 남기고 나왔다.
두어 시간 걸릴 거라는데 그동안 어디 가 있지?
사테 거리 어때. 여기서 안 멀다 야.
콜.
라우파삿 & 사테 거리까지는 도보 12분. 비가 와서 우비를 개시했다. 라우파삿은 먹자골목, 사테 거리는 꼬치 거리.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여서인지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렸다.
꼬치 하나에 맥주 한 잔 하려던 찰나 전화가 왔다. "Hello?" 내 불안한 눈빛을 보고 팡이 손을 내밀었다. 팡은 영어를 잘한다.
지금 자리가 났다고요? 네 10분 안에 가겠습니다.(영어)
부랴부랴 팜 비치로 돌아갔다. 못 먹을 줄 알았던 게 먹을 생각에 다시 신이 났다. 맥주 피쳐와 칠리 크랩을 시켰다. 킬로당 100불 정도였는데, 제일 큰 게 1.6킬로라길래 그걸로 주문했다. 맥주가 너무 시원해서 게 나오기 전에 피쳐 하나를 다 비웠다. 이윽고 나온 칠리 크랩은 게 본연의 맛도 좋지만 소스와의 조화가 워낙 환상적이어서, 우리는 한동안 말도 없이 오로지 먹기만 했다. 남은 소스엔 공깃밥도 추가로 비벼서 마무리. 다 먹은 팡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추천받은 메뉴는 블랙 페퍼 맛이었거든. 근데 칠리맛을 더 많이 시키는 것 같길래 한번 시켜봤단 말이야. 사실 난 칠리소스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아.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맛있냐?
그러게. 이게 너무 맛있다 보니 블랙 페퍼 맛도 궁금해지네. 내일 블랙 페퍼 먹어볼까?
그러자. 미슐랭 3 스타의 기준이 오직 그 요리를 맛보기 위한 목적만으로도 그 도시를 방문할 가치가 있는 정도라고 하잖아. 여기 먹어보니 그런 느낌이 드네.
팡의 말을 들으며 나는 한국에서 이 맛이 그리워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했다. 대게 찌고 칠리소스 잘 버무리면 이런 맛 안 나오려나? 잠시 후 계산서가 나왔다. 돈 관리는 팡의 몫.
30만 원 돈 나왔다 ㅋㅋㅋㅋ 우리 여기 올 때 80만 원 환전했는데.. 반도 안 남았네?
좀 나오긴 했네. 근데 노량진에서 킹크랩 쪄먹어도 그 정도는 드니까 뭐…
진아 우리 내일은 센토사에서 묵기로 했지? 일정상 블랙 페퍼는 못 먹겠다 야.
돈 관리는 팡이 잘한다. 같이 여행하기 너무 좋은 친구다.
오후 아홉 시. 어디 한 군데 더 가기에도, 그냥 숙소 들어가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숙소 근처에 있는 레이플스 호텔이 또 레전드라는 팡의 말에 잠시 구경 가기로 했다. 구글 지도가 안내하는 지상길에는 횡단보도와 보행신호가 당최 보이질 않아, 지하로 굽이굽이 돌고 돌아가야 했다.
길을 묻고 물어 겨우 찾아간 레이플스 호텔은, 외관부터가 아주 웅장했다. 벨 에포크의 싱가포르! 유럽도 아닌 아시아에서, 1800년대에 이런 건물을 지었다니. 어쩌면 이 호텔 짓는데 든 돈이 당시 조선의 1년 예산을 상회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고급졌다. 그저 바깥 구경만 하는데도 좋았다.
오후 열 시. 맥주 사서 숙소로. 재미있는 대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대화했다. 방은 쾌적하고 맥주는 시원하고 대화는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