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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Feb 28. 2019

하노이 여행기 2일 차

2017.6.2.

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네시 반. 일어나기엔 이른 시각이었으나 순식간에 잠이 다 깨어버려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여태 시차 적응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는데... 뭐 괜찮다. 일찍 깨면 일찍부터 놀면 되지. 어제 남긴 맥주를 마시며 못 다 본 영화를 보았다. 참신한 스토리의 명화였다.


영화를 다 볼 때쯤 곽이 일어났다. 곽은 일어나자마자 백종원 커피를 마시고 오겠다며 나갔다. 곽은 백종원을 참 좋아한다. 나야 백종원이야 하나만 택해! 하면 백종원을 택하겠지? 참 쓸데없는 생각이다. 곽이 돌아올 때까지 빈둥대다가 씻고 내려왔다.


호텔 숙박비에 조식이 포함되어 있으나 굳이 먹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거 먹지 말고 나가서 더 제대로 사 먹자고. 근데 1층 사람들 먹는 걸 보니 맛있어 보여 먹고 싶어 졌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다행히 곽도 같이 간사해서 자리에 앉아 이번에도 소고기 쌀국수를 주문했다. 아. 여기도 맛이 좋다. 소고기 쌀국수는 어디서 먹어도 맛있구나. 그러고 보니 베트남 와서 먹은 세 끼가 모두 쌀국수다. 전부 똑같이 소고기 이빠이 들어가 곰탕 맛 나는 쌀국수다. 슬슬 질리는데 곽은 아직 안 질리는 눈치다. 그렇다고 내 입으로 먼저 "슬슬 질리지 않냐?"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아재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까. 점심엔 다른 메뉴가 나오길 맘 속으로 빌어본다.

식사 후 투어 버스를 탔다. 의외로 현지인이 많았다. 베트남 살면서 하롱베이 크루즈 투어 할 정도면 꽤 여유 있는 집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들을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대는데 갑자기 인터넷이 안 된다. 전원 껐다 켜도 보고, 심카드 뺐다 껴도 보는데 되질 않는다. 미련 두지 않고 그냥 책을 읽었다. 호모 데우스. 재밌다. 읽다 졸다 곽과 정치 얘기하다 다시 읽다 졸다 곽과 달님 찬양하다 보니 어느새 하롱베이 도착.

크루즈 여행은 곽도 나도 처음이었다. 영화에서는 산만큼 큰 배에도 바로바로 잘만 타더만. 여기서는 부두에서 먼저 작은 배에 타고, 그 배로 바다 위에 떠 있는 크루즈로 가서 옮겨 타야 했다. 그렇게 탄 크루즈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작았고, 우리 둘을 제외한 모든 승객은 현지인 대가족 한 팀이었다.


잠시 뒤 가이드가 말해주길, 우리가 예약한 '가장 비싸고 좋은 배'는 예약이 가득 차서 할 수 없이 이렇게 다운그레이드 하게 되었으니 배에서 내리거든 다시 여행사 찾아가서 차액을 환불받으라는 것이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아니 근데 이게 말이 되나? 배는 더 후지고, 말 통하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타라고? 하지만 이미 배에 탄 뒤라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오케이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니 차액을 돌려받을 수 있고, 베트남 대가족과 함께하는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배에 타자마자 점심이 나왔다. 게딱지에 붙어있는 어묵, 생선 튀김, 닭고기, 오이 등이 나왔는데 다 맛이 좋았다. 베트남 음식은 한국 아재 입맛에 딱 맞다. 한식 생각이 전혀 안 난다. 양이 특별히 많진 않았는데 옆 사람들은 반 이상 남겼다. 베트남 사람들은 양이 참 작다. 그래서 살이 안 찌나 보다.

밥 먹고 배 옥상에 올라가 바닷바람 맞으며 경치를 즐기다 이내 잠이 들었다. 팔자 정말 좋다. 자다 보니 어느 섬에 도착했는데, 가이드가 케이브 투어라기에 작은 동굴 하나 있나 보다 했더니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구석기에 마을 하나쯤 존재했을 법한 크기였다. 신비로운 동굴 속을 걸으며 나는 와우의 인스턴스 던전을 떠올렸고, 곽은 영웅문을 떠올렸다. 경험이 인식을 지배한다.

다시 배에 탑승. 베트남 아지매 한 분이 자두와 귤을 먹으라고 주셨다. 인심 좋은 사람들. 순대 소금 같은 것도 같이 주셨는데, 이 사람들은 과일을 소금에 찍어 먹는다. 땀을 많이 흘리니 염분 섭취가 좀 필요할 거다. 나도 따라 찍어 먹었다.

잠시 이 가족 이야기를 하자면, 영어가 되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못 나누었지만, 일단 유시민 닮은 한 사내를 주인공으로 두어도 될 것 같다. 얼굴이 그리 그을리지 않은 걸 보면 금융이든 IT든 사무직에 종사 중일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두 딸과 아들, 그리고 세 아이의 엄마라고는 믿기지 않는 외모의 아내가 있다. 아내의 표정은 수시로 굳어졌고 그럴 때마다 유시민 닮은 사내는 안절부절못했다. 게다가 이동 시마다 아내의 핸드백을 손에 든 채 아내 뒤를 따르는 그의 모습은 놀라울 리만치 한국적이어서 문화의 격차가 전 세계적으로 줄어들고 있음을 실감했다. 하긴. 여기 사람들도 전부 아이폰이나 삼성 스마트폰 사용 중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그 사내와 닮았거나, 닮은 사람의 배우자였다. 이들은 왜 여기에 왔을까. 무엇을 축하하러 온 걸까. 칠순잔치? 결혼 기념? 아니면, 그냥? 물어볼 수 없으니 혼자 상상의 나래만 펼쳤다.

배가 서고 이번에는 해변에 내렸다. 모래사장이 있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물은 좁은데 사람은 많아, 나와 곽은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맥주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의 여름 바닷가를 집어삼킨 래시가드라는 끔찍한 옷의 유행이, 여기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다행이다. 래시가드는 정말 몹쓸 옷이다.

해변의 여유를 즐기고 다시 배에 들어오니 외국인 승객이 넷 늘어나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부자-아버지는 경찰, 아들은 학생-와 캐나다에서 온 친구들-한 친구는 중국계 캐나다인으로 약사, 다른 친구는 부탄계 캐나다인으로 공학자-이었는데, 어제 다른 배에서 묵고 오늘이 이틀째라 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늘어나 괜히 반가웠다. 어설픈 영어로 농담을 나누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굴, 새우, 닭고기 카레 등이 나왔는데 이 나라 음식은 도무지 맛없는 게 없다. 곽과 함께 맥주를 계속 시켜 먹었다. 맥주 캔이 작아 계속 시켜 먹다 보니 몇 개나 먹었는지 까먹었는데, 이세돌 닮은 승무원이 꼼꼼하게 메모해두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생긴대로다.

심카드는 여전히 안 된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사기당한 것 같다고 했다. 사기래봐야 고작 9달러짜리인데 하루 종일 인터넷을 못 하니 불편하긴 하다. 곽이 핫스팟 켜줄까 했지만 사양했다. 뭐 좀 불편하게 지내보는 것도 좋지.


저녁 먹고 나서는 가라오케 타임을 가졌다. 베트남 가라오케라 순 베트남 노래뿐이고 한국 노래는 없으며(한류를 과대평가했나 보다), 팝송도 고작 150곡 정도 들어가 있었다. 그중 아는 노래를 골라 프랑스, 캐나다 친구들과 함께 불렀다. 베트남 가족들은 처음엔 수줍어 사양하다가, 계속 권하니 결국 합류했다. 베트남어는 별도의 문자 체계 없이 알파벳으로 발음을 표기해서, 베트남어를 전혀 모르는 나도 반주기 화면을 보며 대충 따라 부를 수 있었다. 그새 친해진 베트남 꼬마가 내 등에 업혔다. 나를 비롯한 비 베트남인들은 Imagine, We are the world, Heal the world 따위를 불렀는데, 생각해보니 배 안의 상황이 가사와 잘 어울렸다. 낮에 예상한 대로 진기한 경험을 했다. 행복했다.

홀이 사람들의 열기로 뜨거워지는 동안 객실은 에어컨의 열기로 서늘해지고 있었다. 노래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 방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다시 샤워를 하고 시원하게 냉방된 방에서 여행기를 쓰다 잠에 들었다.(20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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