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13.
통장에서 숫자로 합쳐지면 다 똑같은 돈이라 해도, 어찌 벌었는지 기념하고 그 쓸모를 구별하면 또 소비하는 재미가 있는 법.
8년 전 함께 썼던 <비만문답>이 어느새 3쇄. 그동안 밀린 인세가 솔찬하여 “이거 입금되면 같이 여행이나 가자”라고 이야기했던 것이 결국 이루어졌다. 대학 동기 친구들끼리 책을 내고, 그 인세로 여행을 간다니 출발부터 낭만적이다. 후쿠오카 2박 3일. 나 빼고 다 유부남인 걸 고려하면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한의사 네 명이 각자 진료를 빼고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했다.
여행은 어디 가서 꿀리지 않게 해 본 우리들. 끼리끼리 논다고 다들 애주가여서, 비행 전 공항 라운지에서부터 술과 함께하기로 아주 작정을 했다. 우리가 모인 곳은 공항 서편 스카이허브 라운지. 나와 곽, 규가 익숙하게 맥주를 들이켜는 동안 심의는 의외로 술을 못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여행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것일까. 우리는 배운 한의사들답게 맥주와 튀김과 통풍과의 연관성 및 혈청요산수치와 페북소스타트의 효능 및 혈중알콜농도의 유지와 기분조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심의에게 술을 먹였다.
심의 너 왜 맥주를 안 마셔?
아 나 지금 배가 너무 불러.
야 그럼 소주 마셔 임마.
예과 시절 술자리에서 선배에게 자주 듣던 말이 내 입에서 절로 나왔다. 모두 눈물 나게 웃었다. 그때 선배들은 왜 그렇게 술을 못 먹여 안달이었나.
10시. 비행기 탑승. 이륙 후 요즘 읽는 책을 꺼냈다. 한국이란 무엇인가. 묵직하면서도 발랄한 글에 여러 번 웃었다. 닮고 싶은 필력.
아무리 재밌는 글이라도 부족한 수면과 취기를 이길 순 없는 법. 잠시 눈을 감으니 이내 승무원이 착륙이라고 깨운다. 후쿠오카는 진짜 가깝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버스를 탈 차례. NFC마크가 붙은 카드가 있으면, 해외에서도 교통카드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곽이 알려주었다. “세계가 그렇게까지 발전했다고?!” 반신반의하며 카드를 대보니 삑 소리와 함께 Thank you. 라는 메시지가 뜬다. 세상 좋아졌다 진짜.
하카타역에서 내려 식당으로. 분명 출발 전 라운지에서 배불리 취했었는데, 그새 배가 술이 고프다. 첫 끼니는 곽이 쏜다며 어마어마한 식당으로 데려갔다. 닌교초이마한. 곁들일 술이라며 귀하디 귀한 몽지람 M9도 쏘는 곽. 역시 병원장님은 다르다.
닌교초이마한의 극상 코스 스키야키는 어마어마했다. 에피타이저와 사시미도 이미 감동적이었지만, 입안을 가득 채우는 스키야키는 그야말로 극상의 맛. 함께 곁들인 몽지람도 좋았다. 마무리로 계란밥까지 예술. 식도락 너무 좋다. 인생 뭐 있나.
식후 들린 곳은 다이소. 일본 다이소엔 없는 게 없었고, 어디서나 한국어가 들렸다. 규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와이프가 사 오라는 것들을 샀다. 총각인 내가 살 건 딱히 없었다.
숙소로 이동하여 체크인. 우리가 묵을 곳은 침대가 4개 있는 게스트하우스. 예과 1학년 감성으로 묵기에 적절하다.
달리기 하러 안 갈래?
콜.
곽은 달리기를 좋아한다. 작년 도쿄여행에서도 같이 신주쿠교엔을 뛰었었다. 달리자는 제안을 나만 수락했다. 1년 만에 둘이 함께 달렸다. 날씨가 뛰기 적당했다. 공기도 좋았다.
돌아와 샤워하고 근처의 이자카야로. 운동 후 마시는 나마비루는 한국의 생맥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시원했다. 오징어회도 자른 방식이 한국과 달라서인지 왠지 더 맛있는 느낌. 우리는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대학 시절을 추억했다. 음식이 한국인 기준 매우 몹시 많이 늦게 나오긴 하였으나, 기다린 만큼 맛있어서 괜찮았다. 먹다 남은 오징어회로 만든 튀김과 초밥은 흡사 현대 설치미술 같았고, 과연 오늘 내로 나오긴 하나 궁금했던 모둠초밥은 오래 걸린 만큼 완벽하여 교과서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을 연상케 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술집을 나와서 걸었다. 후쿠오카 시내까지 족히 30분은 걸었다. 처음엔 선선했는데 오래 걸으니 더웠다. 빠찡꼬에 들어가 곽과 심의는 1000엔씩을 넣었다. 게임이 옆에서 구경하기에도 심각하게 노잼이어서, 처음 넣었던 1000엔만 다 쓰고 나왔다. 다들 도박엔 흥미가 없어서 다행이다.
노미호다이를 하려고 찾아간 술집이 만석이었다. 대신 저렴한 신시대로 향했다. 닭껍질 꼬치에 맥주를 시켰는데, 심의가 한 모금 마시고는 물 탄 맛이라고 혹평했다. 내 입엔 괜찮은데.. 한두 잔씩 겨우 하고 나왔다.
3만 보가 넘게 걸었다. 나만큼 걸었을 곽이 택시를 제안하고, 직접 잡았다. 넷이 다니니 택시 타기에도 좋지 아니한가. 여독이 깊어 차에서부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