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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Mar 01. 2019

<라라랜드>

어느 사랑 이야기

영화를 감상하기에 낮시간의 원장실은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니다. 전화기와 메신저는 성가시게 울려대고, 환자가 오면 어떤 장면에서든 정지해야 한다. 직원과 환자들이 있으니 맘 놓고 울거나 웃을 수도 없다. 굳이 장점이 있다면 단 하나, 일과시간을 이용하므로 퇴근 후의 술 마실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정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긴 하지만 그뿐이다.


널 알기 전엔 일에 빠져 지냈어. 아침마다, 오늘은 또 어떤 환자가 올까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했지. 환자가 오면 뭘 더 해줄까 궁리하고, 오지 않으면 왔던 환자와 내 치료를 하나하나 복기했어. 어떻게 해야 더 잘 치료할까 고민도 했지. 그러니 원장실에서 영화나 보고 있을 시간이 어딨어. 심지어 연애도 매출을 방해하는 요소로 여겼었으니, 말 다 했지.


사실 뮤지컬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허구라는 사실을 적어도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잊을 수 있어야 몰입하여 재미있게 볼 수 있는데, 뮤지컬 영화의 억지스러운 노래와 짜인 춤동작은 자꾸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허구임을 일깨워 도통 몰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라랜드는 꼭 봐야 할 이유가 있었다. 봐야지 봐야지 생각만 하던 이 영화를 결국 한의원에서 보고 말았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그러다 작년 초에 너를 처음 만났어. 넌 참 재밌는 아이였지.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면서도 다른 꿈을 꿀 줄 알았어. 많지 않은 월급으로 날마다 음악, 미술, 체육, 온갖 취미를 배우며 즐기고 나아가 잘 하는 게 내 눈엔 신기하더라. 여유 있게 자라지 않았음에도, 악착같이 살지 않고 오히려 남에게 봉사를 하는 여유가 있었지. 그리고,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예뻤어.


영화 초반은 예상 그대로였다. 막힌 도로에서 운전자들이 뜬금없이 튀어나와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처럼, 멋은 있지만 내게는 그저 그렇고 그런 장면들이 계속 펼쳐졌다. 침을 놓느라, 메신저에 답하느라 정지하기를 수십 차례. 그렇게 한 발짝 뒤에서 멍하니 영화를 관망하듯 보고 있었는데, 한 장면이 갑자기 날 끌어당겼다. 그 유명한 탭댄스 장면. 여기부터 넋을 잃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황홀함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이 영화의 춤과 노래는 몰입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두 연인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였다. 뮤지컬 영화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원장실의 어수선함도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작은 영화와 달랐어. 세바가 처음에 미아를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과 달리, 나는 네게 첫눈에 반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는 영화와 참 많이 닮았지. 우리 역시 서로에게 급히 빠져들고 이내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잖아. 참 자주 만났지. 기억할지 모르겠다. 작년 봄 벚꽃이 만개한 날 밤, 같이 경희대 캠퍼스 걸었던 거. 그날 귀에서 재즈음악 같은 게 들렸던 것 같아. 진짜로.


사랑이 영원히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영화에서는 꿈이 그 이유다. 둘의 꿈은 방향이 달라 교차점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둘은 서로를 사랑하여,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그래서 마침내 헤어지게 된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를 이 영화는 아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리도 미아처럼 연극을 했지. 한 무대에 올라 같은 꿈을 꾸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교차하지 않는 각자의 꿈들이 더 많았어. 서로의 어긋난 꿈과 현실. 그런 것들로 갈등을 겪다 결국 헤어졌지. 이별은 우리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는데.


영화의 결말부는 셉스에 방문한 미아와 그녀를 발견한 세바의 피아노 연주에서 시작된다. 화면은 어느새 처음 둘이 립톤스에서 조우하던 장면으로 바뀌고, 세바는 무심코 지나쳤던 과거와 달리 미아를 끌어안고 키스한다. 가슴이 요동치고 눈물이 솟구치는 장면이다. 그리고 둘만의 꿈같은 시간이 새롭게 펼쳐지는데, 애초부터 영화는 둘의 시간들을 계속 꿈처럼 그려왔으므로, 나는 이것이 상상인지 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감독의 의도였을까?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것이 꿈인지 모르는 법이니까. 연주가 끝나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세바와 객석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앉아있는 미아의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꿈이었음을 알았다. 원하던 재즈바를 차리고, 연기자로서 성공했지만, 남남이 되어버린 둘. 서로의 ‘꿈’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서로’가, 이제는 이루지 못한 꿈이 되어버렸다.


벌써 헤어진 지도 반년이 넘었네. 난 꽤 잘 지내. 네 소식을 자주 듣진 못하지만, 아마 너도 잘 지내겠지. 넌 그런 아이니까. 이별을 고할 때, 라라랜드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했었지. 너와 함께 보지 못한 이 영화를 이제야 보았어. 그래, 네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알 것 같아. 마지막 장면에선 나도 세바처럼 꿈을 꾸었어.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는 꿈. 그랬담 아마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행복 속에 살았겠지.


미아는 셉스를 나서다 말고 뒤를 돌아 세바를 바라본다.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참 동안 서로를 슬픈 눈으로 응시하다가, 끝내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세바는 연주를 시작하고 미아는 가던 길을 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관객의 감정을 통째로 뒤흔들어놓고 영화를 끝내버리니 여운이 짙게 남는다. 이 영화를 두 번, 세 번, 많게는 여섯 번, 열 번 봤다는 지인도 있었다.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2017.7.31.)


https://youtu.be/HSg3tBzAV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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