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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Mar 01. 2019

어쩌다 회식한 이야기

노원구 공릉동 보령한의원

나는 밤마다 약속이 있고 직원들은 모두 학부모여서 우리 한의원에는 회식이 없다. 그래도 정선생님과는 매일 점심을 지하에서 함께 하는데, 최선생님은 도시락을 싸와 혼자 드시는 까닭에 한 상에서 식사해 본 지가 오래다. 그러다 지난 화요일 퇴근 전. 정선생님이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원장님. 내일 오전에 현수가 학예회에서 춤을 춘다는 데 좀 보고 와도 될까요?
현수가 춤도 춰요? 끼가 많네. 몇 시부터 몇 시 까진데요?
오전 열 시부터 열두 시까진가 그래요.
아, 그러면 현수 하는 거 잘 보시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천천히 오세요.
네, 원장님. 오후에 올게요. 오후에 꼭 맛있는 간식 쏠게요.  


평소보다 조금 더 바빴던 수요일 오전. 원래 둘이 하던 일을 갑자기 혼자 하게 되어도 최선생님은 불만이 없다. 오후엔 간식이 넘치도록 들어와서, 정선생님은 간식을 쏠 수가 없었다. 쏘시기로 한 사실조차 잊고 있었는데 정선생님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원장님. 간식 너무 많으니까, 우리 금요일 점심 다 같이 나가서 먹어요. 제가 쏠게요.
에이, 그렇다면 회식이 되는 셈이니 제가 쏠게요.
안돼요, 원장님. 못 쏘게 하시면 저 확 일 그만둘 거예요.


막무가내다. 그렇게 갑작스레 점심 회식이 잡힌 오늘. 점심시간이 되니 두 분 모두 외식할 생각에 설렌 모습이다. 메뉴를 못 정하였길래 공릉동 국수거리의 유명한 국숫집을 제안했다. 같은 공릉동이지만 걸어서 15분 거리. 아줌마 직원 둘이 팔짱 낀 채 앞장을 서고 노총각 원장은 뒤따라 걸었다. 유명한 집답게 손님이 많았는데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다. 두 분은 수제비를 드시겠단다. 나는 칼국수가 당겼다.


수제비 둘에 칼국수 하나요~
지금 시간에 섞어 시키시면 오래 걸려요~
아 그럼 수제비 셋이요~


직원들이 내 눈치 봐서 칼국수로 바꿀까 봐 내가 먼저 수제비로 바꿨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셋이 오랜만에 한 상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내 조카가 수능을 본 이야기부터 최선생님 큰아들이 내년에 수능을 보는 이야기, 작년에 수능 보고 이번에 재수했던 환자 이야기, 지난번에 최선생님이 갔던 식당 이야기, 옆자리에서 나는 발 냄새 이야기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도록 수제비가 나오질 않았다. 아니 이럴 거면 '수제비가 오래 걸린다.'라고 하시지.


20분이 지나서야 주문한 수제비가 나왔다. 그런데 서둘러 먹기엔 너무 뜨겁다. 정선생님은 자꾸 시계를 봤다. 연락처 붙여놓고 왔으니 걱정 말라며 안심시켰다. 직원에게 얻어먹는 수제비 맛이 염치도 없이 좋았다. 국물이 얼큰해서 땀이 쪽 났다.


갈 때는 큰길로 갔는데 올 때는 오솔길로 돌아왔다. 길을 잘 아는 내가 앞장섰다. 돌아오는 내내 두 직원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 종일 같이 있는데도 늘 할 이야기가 있다. 나는 두 분의 대화가 들릴 정도로 앞서가며 한 번씩 추임새를 넣었다. 직원들이 얼굴을 맞대며 웃을 때엔, 나도 따라 웃었다. 길에서 우리 한의원 환자를 마주쳐 셋이 연달아 인사했다.


한의원에 돌아와 양치하며 거울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다. 이 기분으로, 오후 진료 시작이다.(2017.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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