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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Mar 01. 2019

풍림아파트 상가 반찬가게

공릉동 풍림아파트 상가 2층에는 보령한의원, 이미경’s 헤어스토리, 백양세탁소가 있다. 매일 오후 한 시마다 세탁소 사장님, 미용실 원장님과 실장님, 그리고 우리 정선생님과 나까지 다섯 명은 약속한 듯이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 반찬가게에는 동그란 식탁이 있어, 우리는 그 주위에 둘러앉아 같이 밥을 먹는다.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생활하며 밥도 같이 먹으니 그야말로 식구(食口)다.


반찬가게 사장님은 처음엔 밥을 팔 생각이 없으셨다. 날마다 배달음식을 시켜먹다 지친 우리 식구들이 끈질기게 조른 끝에, 각자의 접시에 밥과 반찬을 함께 담아 설거지 감을 줄이는 방식으로 합의를 보았다. 사장님으로서는 밥만 추가로 지으시면 되니 번거롭지 않고, 우리로서는 날마다 맛 좋은 반찬에 갓 지은 밥을 먹을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간이 세지 않아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반찬가게의 스테디셀러는 나물반찬이다. 진열대에는 시금치, 콩나물, 미역줄기, 가지, 고사리 등의 무침과 마늘쫑, 느타리버섯, 새송이버섯, 애호박 등의 볶음이 늘 마련되어 있다. 김치도 배추김치, 총각김치, 깍두기, 열무김치, 물김치, 볶음김치 등 여러 종류다. 언제나 쉬기 전에 동이 나고, 동이 나기 전에 새로 만든다. 일주일에 3일 정도는 잡채를 한다. 어떤 날은 생선을 굽고, 어떤 날은 두부를 졸인다. 도토리묵을 직접 쑤기도 하고 전도 종종 부친다. 국은 매일 다른 종류를 새로 끓인다. 점심때마다 새로 밥을 지어 우리를 먹인다. 나는 이 모든 걸 혼자 해내는 사장님의 성실함을 이루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에도 사장님은 불 앞에서 굽고 지지고 볶으랴 바쁘시다. 이때 전화가 오면 우리가 대신 받아드리고, 손님이 오면 대신 맞아드린다. 한의원 환자를 반찬가게 손님으로 다시 뵙는다. ‘누구였더라?’ 하는 표정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 원장님이시구나.” 하면서 웃으신다. 나도 따라 웃는다.  


이렇게 밥을 먹은 지 2년이 넘어 이제는 서로의 입맛을 다 안다. 북엇국을 좋아하는 세탁소 사장님은 늘 국에 밥을 말아서 드신다. 언젠가는 추어탕이 추어탕인지도 모르고 밥 말아 싹 비우시고는 무슨 국이기에 이렇게 맛있냐며 물으셨던 적도 있다. 미용실 원장님과 실장님은 식성이 비슷한데 특히 양파절임을 좋아하신다. 정선생님은 나물을 좋아하고 고기와 생선은 늘 내게 양보하신다.


오늘은 수육이 푸짐하게 나왔다. 생굴이 들어간 무김치, 보쌈용 배추도 함께 나왔다. 세탁소 사장님이 기분 내자며 막걸리를 사 오셨다. 한 병을 여섯 컵에 나누어 사장님까지 함께 건배했다. 고기와 막걸리에 다들 기분이 났다. 정선생님이 ‘젊었을 때 실컷 놀아봐서 더는 아쉬울 게 없다’ 하시니, 옆에서 듣던 미용실 원장님이 괜히 부러워하셨다. 내가 ‘원장님은 지금도 젊으신데 뭘 부러워하시냐’며 눙쳤다. 불 앞에 계시던 사장님은 ‘스무 살 때 결혼하고 바로 애를 낳느라 팔짱은커녕 손 붙잡고 데이트 한 번을 못 해보았다’고 푸념하셨다. 누군가, ‘팔짱 한번 안 끼고도 애를 낳으셨다’며 ‘하긴 손만 잡고 자도 아이가 다 생기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다 같이 크게 웃었다.

다 먹고 올라와서 혈압을 재었더니 아침보다 더 내려가 있다. 역시 맛있게 먹은 음식은 0칼로리고, 즐겁게 마신 술은 혈압강하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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