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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Aug 23. 2019

뉴욕 여행기 2일 차

2019.4.28.

깼다. 창 밖으로 어둠이 깊어,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님을 알았다. 억지로 더 잠을 청해 보지만, 의식이 잠을 밀어내고 나를 일으켰다. 두 시 반. 잠든 지 다섯 시간 반 밖에 안 됐다. 잠이 오게 하려고 맥주를 마시며 여행기를 썼다. 써놓고 보니 어제는 비행기 탄 얘기가 다다. 켠팡은 아주 깊게 잠들었고, 배는 잠시 깨서 화장실 다녀와 다시 잔다. 나만 깨어 있다. 네 시. 억지로 다시 누웠다.


팡켠이 소란스레 깼다. 덩달아 배와 나도 깼다. 여섯 시. 팡은 어제 술을 못 마신 게 아깝다며, 일어나자마자 냉장고를 열어 달위니를 꺼냈다. 시원하게 마시면 더 맛있는 위스키란다. “나도 한 잔 줘.” 차가운 위스키가 식도를 지나면서, 목이 잠깐 차가웠다가 이내 뜨거워졌다.

팡이 씻는 동안 운동을 하고 오자고 켠이 제안했다. 배와 나는 당연히 승낙했다. 호텔을 나와 브루클린 브릿지까지 살살 뛰었다.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다리에서 맨하탄 마천루들을 보니 설렜다. 그래. 이게 뉴욕이지. 뉴욕에 온 것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샀다. 원래 아아를 마시려 했지만, 나머지 다 뜨아라서 나도 뜨아로 했다. 뉴욕 날씨 쌀쌀하다. 돌아오니 팡은 이미 다 씻은 채였다. 나부터 켠배 순서대로 씻기로 했다. 켠이 씻을 즈음 팡도 바깥 구경을 하고 싶어 해서 내가 같이 나왔다. 문재인 잠바를 입고.


문재인 잠바는 작년에 안선생님에게 받았다. "나는 입을 일이 없지만, 오빠한텐 왠지 있을 것 같아요." 라며 주었다. 그러나 나도 없었다. 입고 나가면 누가 시비라도 걸 것 같았다. 그렇게 넣어둔 잠바가 이번 여행 짐을 싸다가 떠올랐다. 과연, 뉴욕에선 입고 다녀도 아무도 관심이 없다. 좋다.

가는 길에 서브웨이가 보였다. “팡아, 여기 혹시 서브웨이도 짜?” “글쎄, 서브웨이는 안 먹어봤어. 근데 아마 짜지 않을까?” 페이스북 라이브를 켜고 먹어봤다. 짜다. 미국 음식은 다 짜다.


배켠이 씻고 나왔다. 호이트 셔머혼 역에서 다 같이 지하철 타고 이동. 지하철은 청결도로 보나 안전도로 보나 역시 서울만 한 데가 없다. 훌튼 역에서 내렸다. 훌튼이 사람 이름이냐고 배에게 물었다. 거리 이름이란다. 시청 공원을 거닐었다. 작고 귀여웠다.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올려다보았다. 9/11 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이야기 나누었다. 그때는 서로를 전혀 몰랐던 넷이, 그 일이 일어났던 곳에 와 있다. 기분이 묘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센츄리21에 갔다. 배켠팡이 즐겁게 쇼핑하는 동안 나는 의자에 앉아 글을 썼다. 옷엔 관심 없다. 하긴, 그러니까 문재인 잠바 입고 다니지.

다시 전철 타고 브루클린으로. 옆자리에 정신 나간 사람이 있었다. 끊임없이 뭐라 말하며 옷을 입었다 벗길 반복 했다. “여기엔 약쟁이가 많아.” 팡이 말했다. 그 약쟁이는 바닥을 뒹굴고 빙글빙글 돌았지만, 누굴 위협하거나 불쾌하게 하지는 않았다. “착또네. 착한 또라이.” 배가 말했다.


마르시 애브뉴 역에서 내려 뉴욕 3대 스테이크 하우스 중 하나라는 피터 루거로 왔다. Est 1887. 132년 맛집. 오픈 전부터 줄이 서있었다. 30분 기다려서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자리에 앉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릴 거래서, 근처를 한바퀴 돌기로 했다. 리큐르 샵과 와인 샵에서 배켠팡은 어떤 술을 얼마에 파는지 상세히 살폈다. “미국에 왔으니 버번을 먹어야 하는데...” “버번이 뭐야?” 내가 물었다. “싱글몰트는 보리로 만들잖아. 버번은 옥수수로 만든 거야. 미국식 위스키.” “아하.” 그러나 다들 구경만 할 뿐 사진 않았다. 들고 다니기 무거우니까.

식당에 돌아왔다. 한 시간 좀 넘게 기다려, 두시 반에 자리가 났다. 스테이크 3인분에 립아이 스테이크를 추가하고, 베이컨과 웨지 샐러드를 시켰다. ‘루거 라거’라는 하우스 맥주가 있어서 네 잔 시켰다. 어쩌면 인생 스테이크를 영접하기 직전. 얼마나 맛있을까, 다들 기대가 컸다.


일단 빵은 별로였다. 따뜻하지도 않았다. “빵으로 배 불리면 안 돼.” 배가 말했다. 먼저 나온 베이컨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순식간에 다 먹었다. 베이컨은 웨지 샐러드에도 얹혀 있었다. 샐러드 사이사이 치즈가 너무 짰다. 이어서 스테이크가 나왔다. 종업원이 손수 갈빗살, 등심, 안심을 구분해서 각자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기대했던 스테이크. 그러나 처음 입에 넣을 때부터 별 감동이 없더니, 다 먹어갈 즈음엔 물려 버렸다. 나올 때 부가세에 팁까지 인당 100불씩 지불한 것을 고려하면 솔직히 좀 별로였다. 여기가 음식을 못 해서가 아니라, 우리 입맛에 안 맞았다. 아니, 기대가 너무 컸다. 그 시간 기다려서 그 돈 주고 먹을 음식은 아니었다.

식사하고 나오니 날씨가 더 추워졌다. 팡이 가방에 넣어둔 오리털 조끼를 줘서 덧입었다. 문재인을 가리는 게 슬펐지만, 추워서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전철을 타고 훌튼역으로. 트리니티 교회와 뉴욕 증권 거래소와 페더럴 홀을 지나가며 보았다. 황소를 보러 월가에 갔다. 명소답게 사람이 정말 많았다. 눈치껏 끼어들어 사진을 찍었다. “근데 여기에 황소가 왜 있어?” “bull이 원래 상승장을 뜻해. 아래에서 위로 들이받잖아. 반대로 bear는 하락장을 뜻해. 앞발로 내려치니까.” 별생각 없이 물어봤는데, 기대 이상의 답변이 돌아왔다. 역시 회계사.

맨하탄 거리를 걷고 걸어서 차이나타운까지 갔다. 뉴욕 속의 중국. 이 곳 문화는 중국에 가까울까, 대만에 가까울까. 대만에서 못 갔던 코코가 있었다. 버블티 한 잔 사서 넷이 나눠먹었다.


맨하탄 브리지 앞에 사람들이 군무를 추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꽤 잘 췄다. “저 정도 추면 분명 한국인일 거야.” “춤 저렇게 추면 보통 이쁘더라고.” 가서 인사할 생각으로 다가갔는데 한국인도 아니고 이쁘지도 않았다. 애초에 사진 찍으러 왔던 척 셀카만 찍고 돌아왔다.

차이나타운 옆에는 리틀 이태리가 있었다. “여기가 영화 대부의 배경이 되었던 곳인데, 지금은 많이 죽었어. 중국인들이 야금야금 집어먹고 있거든.” 뉴욕에서 1년간 살았던 배가 말했다. 과연 곳곳에 중국 음식점이 보였다.
킹카놀리에서 카놀리와 커피를 마셨다. 카놀리는 크림이 들어간 과자 같은 디저트였다. 세금 포함 29.33불이 나왔다. 잔돈이 없던 켠은 50불짜리를 내며 (나머진 팁을 하시고) 15불만 돌려달라 했다. 그런데 배가 이걸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는 “야 팁 그렇게 주는 거 아니야! 그럴 바엔 차라리 100불짜리를 냈어야 해!”라며 타박했다. “왜?” “그게 말이야…” 배는 열심히 설명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팁 문화 너무 어렵다.

다시 걸어서 소호로 갔다. 배는 블루밍데일즈라는 백화점 앞에서 멈췄다. “여기엔 공중 화장실이 있어. 그래서 지나가다 보이면 들려. 전철역엔 우리나라와 달리 화장실이 없거든.” 우리나라, 좋은나라. 모던 아트 전시관이 있었다. 공짜여서 잠깐 구경했다. 블루보틀이 보여서 다가갔다. 이미 문이 닫혀 있어 못 마셨다. 배가 갑자기 벽에 붙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어달라 했다. 알고 보니 이곳이 12년 전 배가 영어를 처음 배우러 왔던 모교였다.

많이 걸었다. 숙소에 돌아가 잠깐 쉬자는 말에 모두 동의했다. 전철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맥주와 위스키를 마시며 각자 쉴 계획이었다. 그런데 왜 팁 생각이 났을까. “배야. 그러니까 아까 팁을 거슬러달라 한 게 왜 잘못된 거야?” “잘못된 건 아니고, 좀 이상한 거야. 음… 비유하자면, 조카한테 만 원짜리 주면서 ‘용돈은 오천 원이니 나머지 오천 원은 거슬러 오라’는 셈이야.”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팁을 어떤 경우에 왜 주는지, 어떤 경우에 왜 주지 않는지, 안 주면 어떻게 되는지, 카드 결제 시엔 어떻게 주는지, 진료나 상담을 받을 때에도 주는지, 종업원이 아닌 사장에게도 주는지, 팁과 최저임금은 무관한지, 팁도 세금을 내는지, 한국에서는 언제 어떻게 왜 팁을 주는지 등. 팁이란 주제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재밌게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또 있을까. 자주 만나도 지겹지 않은 이유가 있다.


아홉 시 반. 더 늦기 전에 나가야 한다. 일부러 브루클린 브리지 역에서 내려 다리를 건넜다. 야경이 아름다워 가슴이 설렜다. 가져온 짐벌로 파노라마 샷을 찍었다.

다리를 건너 다시 전철을 탔다. 33번가 역에서 내려 코리아타운에 왔다.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뚜레쥬르를 본 팡은, 굳이 들어가서 ‘여기서도 cj임직원 할인이 되는지’ 물어보았다. 우리는 일행이 아닌 척 밖에 있었다. 팡은 빈손으로 나왔다. 할인 적용은 안 된단다. 코리아타운은 한 블록 길이의 길 하나가 다였다. 그 작은 곳에 한의원이 세 개나 있었다. 아휴 원장님들. 먹고는 사실지 몰라. “내 보아하니, 여기서 고려서점이랑 카페베네 빼고는 다 짜. 무조건 짜.” 팡은 한인식당에도 기대가 없었다. 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 포차32 가자. 많이 가던 곳이야.”


포차는 뭐 완전 한국이었다. 한국인들이 한국 노래를 들으며 한국음식에 소주를 먹고 있었다. 과연 맛도 한국일까? 우리는 제육두부김치와 라면을 시켰다. 둘 다 애초에 짠 음식이긴 하지만, 그보다 특별히 더 짜지는 않았다. 심지어 맛있었다! 역시 한식이 최고다.

팁 실전문제. 음식값은 세금 포함 59.xx불이 나오고, 권장 팁에 음식값의 20%로 11.xx불이 적혀 있을 때, 얼마를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가?!! 켠은 먼저 팁 포함 70불을 줄 생각으로 20불 3장, 10불 1장을 끼웠다. 배가 만류했다. “잔돈을 그렇게 다 쓰면 어떡해. 그냥 100불짜리 내 일단.” 아. 100불 내고 거슬러 받는 거구나. 켠은 100불을 끼웠다. 멕시칸 출신 종업원은 돈을 받아가면서 “Do you want change?” 하고 물었다. “Yes.” 배가 딱 잘라 말했다. “100불 내면 당연히 거스름돈 가져와야지 왜 매너 없게 물어보고 그래.” 아. 100불 내면 당연히 거스름돈 가져오는 거구나. 거스름돈은 여자 종업원이 가져왔다. 20불 1장, 10불 1장, 5불 2장과 동전. 여기서 배와 팡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 사람 센스 있네. 10불 1장, 5불 1장 남겨.” 부연설명이 필요했다. “왜 센스 있는 거야?” “이건 5불도 10불도 15불도 가능한 조합이잖아. 선택권을 나한테 넘긴 거야.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하고. 그럼 기분 좋게 15불 줄 수밖에 없지.” 아. 어렵다. 팁 문화.


이미 한 시가 넘었다. 밖에 나왔다. 베이글 파는 푸드트럭이 있어 레귤러커피를 두 잔 샀다. 맥심 같은 맛이었다. 커피 탓인가? 배가 삘을 받았다. “그냥 여기까지 온 김에 타임스퀘어 갔다 갈래? 얼마 안 멀어.” 타임스퀘어 가자는데 누가 거절하나. 그렇게 또 한 30분을 걸었다.

브로드웨이는 낮처럼 환했다. 타임스퀘어에 오니 가슴이 벅찼다. 서로 말도 없이 각자 멈춰 서서 타임스퀘어를 느꼈다. 돌이켜보면 유명한 랜드마크에 처음 가보는 순간은 늘 그랬다. 삼성과 엘지와 네이버가 광고를 크게 넣고 있었다. 국뽕이 차올랐다. 넷이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뉴욕은 전철을 24시간 운행한다. 전철을 타고 브루클린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두시 반.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배는 전화를 받았다. 매출과 제조원가와 회계와 감사와 그런 종류의 단어들이 나오는 걸 보니 일과 관련된 전화였다. 와. 일어난 지 20시간 반이 지난 새벽 두 시 반에 저게 가능해? 괴물이다 괴물. 진켠팡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가는 길에 피자를 두 쪽 샀다. 안주삼아 위스키를 마셨다. 팡이 먼저 코를 골았다. 켠이 다음으로 잤다. 배가 잠들고, 나도 폰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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