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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Aug 28. 2019

뉴욕 여행기 6일 차

2019.5.2.

깼다. 네 시 사십오 분. 아. 시차 적응은 끝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잠든 지 한 시간 십오 분 만에 깨냐. 배켠팡은 잘 잔다. 사진을 정리해 여행기를 올렸다. 맥주 마시며 게임 한 판. 여섯 시 반에 다시 누웠다.


여덟 시. 알람이 울렸다. 오늘은 일찍 나가기 위해 다 같이 전략을 짰다. 먼저 켠이 샤워한다. 그동안 팡은 면도를 한다. 두 번째로 내가 샤워하고, 그동안 팡은 양치를 한다. 세 번째로 팡이 샤워한다. 마지막으로 배가 샤워하고, 그동안 팡은 왁스를 바른다. 팡 한 명 씻는 동안 다른 세 사람이 다 씻는, 이론상으론 완벽한 계획이었다. 목표는 열 시 출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아홉 시 십오 분. 먼저 씻은 나와 켠은 커피를 마시러 나왔다. 옐프(맛집 어플)를 보고 찾아간 커피숍이 브루클린 로스쿨 내부에 있었는데, 입구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길래 발길을 돌렸다. 오늘도 호텔 아래의 화이트 노이즈에서 마시기로. 배팡이 내려온 것은 10시 2분. “이 정도면 계획 성공입니까?” “아니, 가봐야 알아.” 배는 냉정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팡에게 커피 마실 시간을 줬다. 배는 늘 투덜대지만, 결국 팡이 해달라는 거 다 해준다.

커피는 금방 마셨다. 전철을 타고 훌튼 역에서 내려 사우스 시포트까지 걸었다. 도중에 한 백인 노부부가, 전철역이 어디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친절히 알려드렸다. 훗. 우리가 뉴요커로 보이나 보다.


11시 3분. 페리 선착장 도착. 열한 시 배는 이미 떠났다. 다음 배는 열한 시 반. 기다리는 사이 핫도그와 케밥을 사 먹었다. 둘 다 맛있었다. 길거리 음식도 맛있게 먹을 줄 알고, 완전 뉴요커 다 됐다. 배에 탔다. 일찍 줄을 섰던 만큼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살살 흔들리는 배 위에서 편안히 눕듯이 기대앉으니 기분이 좋았다.

배는 열한 시 반을 조금 넘겨 출발했다. 덩치 좋은 아저씨가 배 중앙에서 큰소리로 설명해 주었으나, 나는 다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한국어가 지원되는 오디오 가이드 애플리케이션이 존재했는데, 애플 앱스토어에만 있고 구글 플레이스토어에는 없었다. 고맙게도 켠이 에어팟 한쪽을 빌려줬다. 페리를 탈 땐 꼭 아이폰 유저를 데려가자. 수상에서 보는 맨해튼의 스카이 라인이 볼만했다. 어쩜 저렇게들 높을까. 어쨌든 페리를 탄 이유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함이다. 선상에서 본 자유의 여신상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모종의 감동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 마음에 담아 갈 생각으로 오래 응시했다. 한국인 관광객 두 분이 계셔서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다. 알고 보니 우리와 같은 날 같은 비행기로 오셨단다. 어디가 어땠는지 서로의 경험을 공유했다. 인싸인 척 sns 친추도 구걸했다.

배에서 내려 가이드에게 물었다. “배야, 이제 어디가?” “먼저 여기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먹고 이동해야 돼. 뭐 먹을지 골라봐. 일단 유명한 소롱포 집이 있고…” “야 소롱포 먹으러 가자. 여기 와서, 아니 오기 전부터 소롱포 얘기 한 천 번 한 것 같다.” 켠이 말했다. 천 번은 분명 과장이지만, 적어도 백 번쯤은 한 것 같다. 소롱포 먹으러 차이나타운의 조스 상하이에 갔다. 소롱포 2판과 춘권, 칠리새우, 닭을 작게 조각내 볶은 요리, 사천식 볶음면과 칭다오를 시켰다. 과연 소롱포 맛집답게 육즙이 충실히 담겨 있었다. 춘권도 맛이 좋았다. 칠리새우는 맛없기 힘든 메뉴다. 닭 요리와 볶음면은 그저 그랬다. 칭다오는 용량이 너무 적었다. 서빙을 보는 직원들이 불친절했다. 팁을 적게 주고 싶었지만, 팁이 계산서에 포함되어 나오는 집이라 그럴 수 없었다. 대신 1센트도 더하지 않고 딱 적힌 금액만큼 놓고 나왔다. 107.85불.

날씨가 너무 좋았다. 뉴욕에 와서 처음으로 맑았다. 더워서 외투를 벗어 들고 걸었다. 걷는 동안 수차례 본의 아니게 켠의 운동화를 밟았다. 어제 사서 개시한 흰 운동화다. “그만 좀 밟아. 벌써 몇 번째 밟는 거야. 천 번은 되겠네.” 물론 그만큼 밟진 않았다.

차이나타운을 벗어나 전철을 타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이동했다.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79층으로 이동했다. 창 너머로 벌써 뉴욕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셀카를 찍어보지만, 얼굴이 보이면 도시가 안 보이고, 도시가 보이면 얼굴이 안 보였다. 무의미했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86층으로 갔다. 전망대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동안 높은 곳을 워낙 많이 올라가 본 터라 높이로 인한 감흥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서울이나 도쿄, 홍콩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고층건물이 많다는 점은 인정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이 건물이 무려 1931년에 준공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88년 전에 이미 이런 건물을 지었던 나라. 그런 나라를 상대로 일본이 전쟁을 벌였던 거구나. 겁도 없이.

내려오니 네 시. 다섯 시 반에 문을 닫는 모마를 가기엔 좀 늦은 시각이다. 대신 허드슨 야드의 베슬을 보러 가기로 했다. 가는 길목에 커피를 한 잔 하자 했으나 들르는 커피숍마다 자리가 없었다. 갈증과 피로를 내려놓지 못한 채 베슬에 도착했다. 먼저 멀리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배켠팡은 지쳐 보였다. “사진 찍었으니까 이제 가자.” 나는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야. 저기 올라가 봐야지.” “야 여기까지 걸어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저길 또 올라간다고? 그리고 저기 유료일 걸?” 가이드인 배가 말했다. 그러나 베슬은, 배가 뉴욕에 살 땐 없던 건축물이다. 검색해보니 입장은 무료다. 안에서 찍은 사진들을 배켠팡에게 보여주며 설득했다. “저긴 이렇게 멀리서 보고 끝낼 게 아니라, 직접 들어가서 체험해야 하는 공간이야.”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입장 시간이 적힌 무료 티켓을 받고 기다렸다 들어가야 했다. 그동안 옆의 빌딩에서 커피를 한 잔 하기로 했다. 마침 블루보틀이 있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다는, 그 핫한 블루보틀. 시그니쳐인 뉴올리언스 네 잔을 시켰다. 다 합해서 18.51불. 기대하며 빨대를 꽂았다. 익숙한 맛이었다. 맥심. 배가 말했다. “둘둘이네. 커피 둘, 프림 둘.” 개발자인 켠이 말했다. “스타벅스가 마이크로소프트라면, 블루보틀은 애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 맥심은 삼성이네?” 배가 덧붙였다. 한국 가면 다 같이 맥심 모카골드 한 잔 해야겠다.

시간이 되어 입장. 입구에는 사람들이 폰을 바닥에 내려놓고, 베슬 사이로 하늘이 보이는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따라 찍었다. 한 칸 두 칸 올라가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위아래를 바라보고 사진을 찍으며 놀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세 층 정도 올라가자 다리가 풀리고 겁이 나서 난간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경도의 고소공포증. 가끔 복도식 아파트에서 발동할 때가 있긴 했는데, 여기서도 발동할지는 몰랐다. 벽이 트여있어서 그런가?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불안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오히려 배켠팡은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며 신나게 놀았다. “너희는 안 무서워?” “응. 왜?” 고소공포증은 나한테만 있었다. 넷이 난간에 기대고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찍는 내내 불안해 견디기 어려웠다. 사진을 다 찍고 내려오니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도 갔다 오길 잘했다.





여섯 시 반. 알마니 익스체인지가 있는 피프쓰 애비뉴로 갔다. 팡이 엊그제 못 친 아도를 치는 동안, 나와 켠은 옆의 마이크로 소프트에 갔다. 마소는 xbox를 적극적으로 미는 듯했다. 1층에는 레이싱 휠이, 2층에는 서서 엑박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3층에는 아예 엑박 게임룸이 있었다. 모든 체험이 무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지 않은 게 신기했다. 여기 사람들은 공짜를 안 좋아하나.

저녁은 근처의 타오로 갔다. tao는 영어사전에도 있는 단어로, 유교나 도교의 도(道)를 뜻한다. 중화풍 인테리어의 아시안 퓨전 레스토랑이었는데, 음악의 볼륨과 분위기가 식당보다는 클럽이나 라운지바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화장실에 갔더니 웨이터가 있었다. 수도를 틀어주고, 비누를 짜 주고, 페이퍼 타월을 건네주는, 전혀 필요치 않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팁을 받고 있었다. 1달러 주고 나왔다. 

랍스터와 새우가 들어간 춘권, 바삭한 롤, 칠리 닭튀김, 돼지고기 볶음면, 돼지고기 볶음밥과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뉴욕 와서 먹은 음식의 반이 중식이다. 면이 좀 짠 것 빼고는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맛과 분위기에 비해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세와 팁을 포함해서 180불. 기분 좋게 나왔다.

어디 가서 맥주나 한 잔 할까 하다, 차라리 숙소에서 좋은 술을 편하게 마시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갑자기 피곤해졌다. 세 시간도 못 잤으니 그럴만하다. 팡의 꽁무니만 좇아 꾸벅꾸벅 졸면서 걸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열한 시. 맥주 한 모금 마실 체력도 없었다. 침대로 빨려 들어 그대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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