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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Aug 28. 2019

뉴욕 여행기 8일 차

2019.5.4.

여섯 시 사십 분 기상. 눈 뜨자마자 어제의 여행기를 썼다. 쓰다 보니 어젯밤 내가 얼마나 피곤했었는지 느낌이 온다. 그러는 사이 켠배팡이 깼다. 유튜브를 보고 핸드폰을 하며 뒹굴거렸다. 다들 느긋하게 씻었다.


배는 뮤지컬 표를 사러 다녀온다고 나갔다. 티켓을 싸게 구할 수 있을까 해서 매일 브로드웨이 로터리에 응모했지만, 결국 당첨이 되지 않았다. 어젯밤, 제값을 주고라도 볼 것인지 의논한 결과, 만장일치로 보기로 했다. 그래서 배가 표를 사러 나간 것. 줄을 서야 해서 한 시간은 걸린단다.


내일 귀국이니 오늘이 사실상 마지막 날이다. 팡은 편안히 씻게 두고, 켠과 함께 커피 사러 나왔다. 비가 보슬보슬 내려서 어제 산 레인코트를 개시했다. 비 오기 전날에 레인코트를 사다니. 운이 좋다. 옐프 보고 찾아간 비블 앤 십은 자리가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주위나 한 바퀴 돌자며 거리를 걷다가 힙해 보이는 카페를 발견했다. 그라운드 센트럴. 줄을 서서 커피를 샀다. 

둘이서 양손에 커피를 들고 나왔는데 거짓말처럼 배를 만났다.숙소 앞의 피자집에서 피자와 샌드위치를 샀다. 방에서 다 같이 먹었다. “맛있는데?” “어, 나도 맛있어.” “심지어 짜다고 안 느껴져.” “뉴욕 음식 적응 완료?” “피터 루거, 지금 다시 먹으면 인생 스테이크 등극하는 거 아니냐?” 뉴욕 음식은 마치 평양냉면처럼, 충분히 먹어봐야 비로소 맛을 알게 되는 걸까.

숙소 벨이 울릴 때마다 켠은 스프링처럼 튀어나갔다. 기다리는 택배가 있어서였다. 뉴욕에서 택배라니? 이야기는 3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드버리의 생 로랑에 켠의 마음에 드는 신발이 있었는데, 마침 맞는 사이즈가 없었던 것. 그래서 먼저 결제를 할 테니, 다른 매장에서라도 맞는 사이즈를 구해서 이 호텔로 보내달라고 직원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켠은 초조해했다. “이러다 귀국할 때까지 안 오면 어쩌지?” “아. 오늘 주말이잖아. 오늘 내일은 택배 안 올 것 같은데?” 배가 냉정하게 덧붙였다. “켠이 신발 살 때 내가 말렸거든. 너 이거 혹시라도 택배 못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그랬더니 켠이 뭐랬는 줄 알아? 이 신발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살 가치가 있다는 거야.” 못 받을 위험을 감수하고도 살만한 물건이라니. 난 그런 물건을 본 적이 없다. 켠은 참 낭만적인 친구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미술관. 가이드인 배가 말하길, 메트(the Met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는 전철로 가기가 불편하니 버스를 타잔다. 버스도 추가 요금 없이 우리가 끊은 정액권으로 탈 수 있었다. 개이득?! 어퍼 이스트 사이드는 멀지 않았다. “여기 딱 봐도 부내 나는데? 배야, 여기 부촌 맞지?” 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켠은 냄새를 잘 맡는다.

부내 나는 길을 잠시 걸으니 메트가 나왔다. 사실 나는 뉴욕 오기 전까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팡에게 듣자 하니 소장품이 무려 350만 점으로,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란다. 급이 되는 미술관답게 건물 외관도 아름다웠다. 분수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입장하자마자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다. 대여료 7불. 목에 거는 전화기 형태였다. 이미 여러 번 와본 배는 따로 보겠다며 사라졌다. 진켠팡은 팡의 제안에 따라 유럽 회화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과 <자화상>, 에드가 드가의 <발레수업>, 로사 보뇌르의 <말 시장>, 조르쥬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습작> 같은 명작을 찾아 감상했다. 평소처럼. 그러다 뭔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트는 일반적인 박물관과는 클래스가 달랐다.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거장의 유명한 작품들이 잠자코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조각도 마찬가지. 통로에 서있는 쇳덩이가 알고 보니 로댕이고, 벽에 걸린 인테리어가 가만 보니 마네 모네 르누아르였다. 작은 미술관에 있었다면 그 미술관을 대표했으련만, 여기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존재하는 작품들. 그런 작품들이 빼곡한데 특정 작품을 찾아 움직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래서 그냥 발길 가는 대로 움직였다. 일단 최대한 많은 방을 돌아보되, 꽂히는 작품이 있으면 멈춰서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한나절을 돌았으나 다 못 돌았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동서고금의 다양한 작품을 폭넓게 소장 중인 것 외에도 메트만의 특징이 있었다. 대부분의 그림과 조각에 접근 금지선을 걸어두지 않은 것. 원한다면 맞닿을 거리까지 다가가서 볼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정교한 디테일이 더 놀랍게 다가왔다.

다음 일정은 뮤지컬. 그전에 저녁을 먹어야 한다. 브로드웨이로 돌아와 맥도널드에 갔다. 나는 빅맥을 주문했다. 한국에서 먹는 빅맥과 같은 맛이었다. 한때는 최애 버거였는데, 별의별 고급 버거를 섭렵하고 나니 초라해 보였다. 그래도 옛 생각하며 맛있게 먹었다.

오늘 예매한 뮤지컬은 프로즌. 생각보다 극장이 작고 무대가 가까웠다. 배우의 표정이 어느 정도 보일 거리. 사실 별 기대 안 했었다. ‘애들도 보는 만화를 기반으로 한 뮤지컬이 뭐 별거 있겠어? 브로드웨이 왔으니 경험 삼아 보고 가는 거지.’ 완전히 오산이었다.

공연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넘버가 끝날 때마다 저절로 박수가 쳐졌다. 공연이 끝나고는 전원이 기립박수를 쳤다. 팔이 아프도록 손뼉을 부딪혔다. 90불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와. 진짜 최고다. 공연 보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어. 행복하다.” “그러게. 이거 마지막 날에 봤으니 망정이지, 일찍 봤더라면 다른 공연들도 다 챙겨 봤겠다.” 배켠팡도 감동을 받았다. 보고 나면 행복해지는 공연. 이런 공연을 하고 싶다.

공연을 본 다음 루프탑 바에 가려했었는데, 몇 군데 알아보니 이미 문을 닫았거나 줄이 너무 길었다. 하는 수 없이 호텔로 돌아왔다. 켠 신발은 아직 오지 않았다. 호텔 7층 바에서 맥주를 마셨다. 팡이 호텔에서 제공하는 구미베어를 받아왔는데, 하리보보다도 맛있었다.

방에 우리의 위스키가 있었다. 바에선 목만 축이고 올라왔다. 침대 사이에 다리미대를 깔아 간이 식탁을 만들었다. 과일을 안주삼아 맥주와 위스키를 마셨다. 배켠팡진은 말이 많다. 몇 년을 같이 마셔도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함께 여행을 복기하며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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