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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Sep 05. 2019

태국 여행기 4일 차

2019.7.12.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깨었다 다시 잠들길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다 창 밖이 밝아질 무렵, 꼬끼오 소릴 들으며 눈을 떴다. 일곱 시. 닭 우는 소리에 깨어난 게 얼마만인가. 참 정겹다. 이 동네.


여덟 시 반. 똑똑. 형이 방문을 두드렸다. 


기침하셨습니까. / 아침 먹으러 가자. / 안 씻고 바로요? / 응. 일단 가자.

주섬주섬 옷 챙겨 입고 심향1으로 갔다. 날이 밝으니 스쿠터 타기가 더 좋았다. 스님께 인사드리고 사과차를 받아 마셨다. 이 곳의 스탭, 오랜 투숙객, 희형, 나 이렇게 넷이서 아침을 먹었다. 메뉴는 어제와 비슷했다. 대구 출신으로 양작을 알고 있는 오랜 투숙객에게 빠이에서 뭘 하면 좋을지 물었다. 별 보기 좋은 곳, 온천 하기 좋은 곳, 좋은 바, 맛있는 집 등을 추천받았다. 그녀는 치앙마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라며 빠이를 극찬했다. 호오.

스님께도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심향에 간혹 다른 스님들도 묵으러 오는데, 와서는 다른 투숙객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또 새벽부터 염불 외어 사람들 깨우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쫓아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신다. 일반인 투숙객도 마찬가지. 좋은 사람도 많지만, 물건 훔쳐가고 돈 떼어먹는 못된 사람들도 많단다. 드라이기며 프로젝터며 분실되기가 예사. "내가 이거 하면서 진짜 공부 많이 해." 중생들을 먹이고 재우며, 스님은 공부를 하고 계셨다.


심향1을 좀 둘러보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자꾸 나한테 와서 엥긴다. 내 발에 자꾸 자기 몸을 비빈다. 턱에 힘을 뺀 채 살살 나를 깨물고, 간드러진 소리로 교태를 부린다. 좀 쓰다듬어 줬더니 아예 내 앞에 드러눕는다. 세상에 이런 개냥이가 있나. 다른 개 한 마리는 사람과 친해 말도 다 알아듣는데, 한국어만 알아듣고 태국어는 못 알아듣는단다. 낯익은 사람이 스쿠터를 타면 그 받침대에 올라타 함께 돌아다니길 즐긴단다. 심향1에는 그 외에도 여러 마리의 고양이와 강아지가 함께 산다. 다 사람을 좋아한다. 늘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자라서인지, 사람에게 조금의 적대감도 없다. 어떤 투쟁도 겪지 않은, 겪지 않아도 되는 묘생과 견생은 그저 평화롭다.

다시 숙소로. 씻고 여행기 쓰다 보니 열두 시. 마사지라도 받으러 나가야지. 형은 쉬게 두고 혼자 나왔다. 다들 추천하는 PTTM(Pai Traditional Thai Massage)으로 갔다. 낮이라 그런지 사람은 없었다. 타이마사지 200밧. 싸다. 안마 전 스스로 발을 씻는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 야무진 생김새의 태국인 아주머니는 신체 각 부위에 따라 압의 강도를 적절히 조절할 줄 알고 계셨다. 한 시간 동안 꿈나라인지 어딘지를 다녀왔다. 감사한 마음에 40밧을 팁으로 드렸다. 형에게 톡이 와 있었다.

끝났냐? / 네. 방금. / 밥 먹자. / 어디 갈까요. / 국수? / 고고


구글 지도로 공항쌀국수에 갔다. 정작 지도에 찍힌 곳은 문을 닫았는지 보이지 않아, 근처에 보이는 곳으로 갔다. 어렵게 의사소통하여 시킨 노란 국수 하나, 하얀 국수 하나. 하얀 건 쌀인데. 노란 건 밀? 옥수수? 계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맛있었다. 가격은 30밧. 1200원. 미친 가성비.

다음은 전망대에 가보기로. 네비를 켜고 앞장서 가는데 언젠가부터 형이 따라오지 않는다. 


형, 왜요? / 기름 바닥났어. 


방향을 돌려 형에게 갔다. 


어떻게, 아예 안 가요? / 응. 이것 봐 완전 엥꼬야.


형이 기름통 뚜껑을 열어 보여준다. 완전히 비어있다.


어떡하죠? 기름 좀 구해 올까요? / 응. 가서 좀 얻어와라. / 오케이.


이럴 땐 일단 한국 사람을 만나야 한다. 심향1으로 와서 도움을 요청했다. 수염 난 분께서 답해주셨다. 어제 우릴 안내해주신 분이다.


저 지금, 같이 온 형 스쿠터 기름이 다 떨어져서 서있거든요. 자바라나 기름통 어디서 구하죠? / 어디서 멈췄는데요? / 공항쌀국수에서 전망대 가는 오르막길요. / 다행이다. 그러면 오르막길 되돌아 내려오면 주유 자판기 있어요. 거기다 20밧 동전으로 넣고 주유하면 일단 움직일 거예요. 그렇게 응급 처치하고 주유소 가서 넣으면 돼요. / 아 그렇구나. 미리 주유를 했어야 되는데. 저희 스쿠터 유량계가 다 고장 나서 넣을 생각을 못 했어요. 받았을 때부터 Empty에만 가 있더라고요. / 아, 그건 고장 난 거 아녜요. 원래 빌려줄 때 기름 없이 줘요. 빌리자마자 기름 넣어야 돼요. / 헐.


그러고 보니 내 스쿠터 기름도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먼저 주유소에 가서 내 스쿠터부터 주유했다. 와. 과연 계기판이 F로 올라온다. 우린 계기판이 처음부터 E에만 있다고, 당연히 고장이라 여겼다. 편협한 생각이었다. 

다시 형에게로 갔다. 형은 별다른 좌절 없이 나를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여유롭게 포즈까지 잡는 모습. 진짜 느긋하다. 형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아래로 내려가 응급처치를 하고, 그 기름으로 주유소까지 가서 가득 주유했다. 상황 종료.

다시 전망대로. 구글 지도를 보며 찾아갔다. 전망대 가까이는 차이나타운이어서, 길가에 한자가 많이 보였다. 전망대 이름도 한자였다. 구름 운, 올 래. 중국 발음으로 윤라이. 전망대답게 뷰가 좋았다. 형과 함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사진 속에는 제대로 말리지 못한 머리에 땀이 나고 바람을 맞아서 세상 못생긴 내가 있었다. 핵존못. 아무렴 어떠랴. 그것도 내 일부인 걸.

마을로 돌아왔다. 주스를 사고 과일을 샀다. 소주를 사려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안 되어서 못 샀다. 술은 오후 다섯 시부터 열두 시 까지만 살 수 있단다. 그럼 마시는 건 되나? 형은 쪼리를 샀다. 55밧. 나는 75밧 모자와 120밧 바지, 150밧 티를 샀다. 장착 시 현지화 +1 되는 아이템들로. 이제 심향1 가야지. 아, 그전에 소주부터 사고. 다섯 시 넘었으니까.

심향1 휴게소엔 스님이 앉아 계셨다. 스님께 인사하고, 한의사로서 해드릴 게 없을까 하여 예의상 건강에 대해 여쭈었다. 스님은 오십 년 전 군 제대 후 건강검진받던 이야기부터 육영수 여사 주치의에게 진료받았던 이야기, 위가 안 좋아서 검사도 않고 개복 수술했던 이야기, 커피와 담배 끊으라는 의사 말 무시하고도 지금까지 병의원 다니지 않고 있는 이야기 등을 쉬지 않고 털어놓으셨다. 스님께 함부로 질문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껏 인생을 회고하신 스님은 기분이 좋아지셨는지 고기를 굽자며 교수님을 부르셨다. 교수님은 백석대 실용음악과에 계셨던 분인데, 방학만 되면 여길 오신단다. 교수님이 굽는 고기를 교수님 포함 나 희형 울님 범님(수염 난 분) 다섯 이서 먹었다. 얇은 삼겹살, 두툼한 삼겹살, 목살, 엉덩이살 등을 김치 마늘 고추 파와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다섯 중 홍일점인 울님은 범님과 커플이다. 맘 붙일 여자 한 명 없는 자리에서 교수님은 묵묵히 고기를 구우셨다. "남자라서 죄송합니다, 교수님." 내가 자진해서 사과했다. 어딜 가든 쓸데없이 수컷만 많다.


스님은 처음엔 고기를 안 드셨다. 육식을 거부하여 안 드시나 했는데, 고기가 남으니 마다하지 않고 드셨다.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듯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정리하는 데에는 우리보다 스님이 더 열심이셨다. 스스로 이룩해놓은 공간에서, 스님은 어떠한 권위도 내세우지 않으며 자신의 몸으로 생활을 실천하고 계셨다.


2차는 제임스. 이름만 봐선 위스키라도 팔 것 같지만, 현지인 식당이다. 갈비탕과 쌀국수가 주 메뉴. 각자의 스쿠터를 타고 이동했다. 쌀국수 35밧, 갈비탕 40밧.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고기가 이만큼 들었는데 1600원이라니. 정말 저렴하다. 도중에 관장님이 합류했다. 작년에 여기 여행 왔다가 너무 맘에 들어서, 올해는 아예 자리 잡을 목적으로 오셨단다. 현지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며 정착하고 있는데 쉽지는 않다고. 어쨌든 남들 다 가는 정해진 길이 아니라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가는 모습이 멋졌다. 잘 되셨으면 좋겠다.

아홉 시. 일찍 마셨더니 일찍 취했다. 각자 숙소로 돌아와 누웠다. 에어컨이 시원했다. 여행기를 썼다. 열 시. 피곤하다. 일곱 시에 일어났으니 그럴만하다. 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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