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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피엔드 Sep 05. 2019

태국 여행기 5일 차

2019.7.13.

어제처럼 온갖 뒤숭숭한 꿈을 꾸며 자다 깨길 반복했다. 방이 에어컨을 켜면 춥고 끄면 더워, 켰다 끄길 또한 반복했다. 일곱 시 반 기상. 여행기를 정리하다 여덟 시 반에 방에서 나왔다. 신라면 냄새가 났다. 


형 혹시 뽀글이 해 드셨어요? / 아니, 냄비가 있어서 끓여 먹었지. / 맛납니까. / 시원~하지. 너도 먹을래? / 아뇨, 됐어요.


나는 아침을 잘 안 먹는다. 아침엔 배가 안 고프다. 2년 전인가? 형에게 살찌는 약을 먹인 적이 있다. 6개월 동안 온갖 처방을 다 써봤는데 고작 1킬로 쪘었다. 분명 먹는 양이 적을 거라 생각했는데, 같이 있어보니 절대 적지 않다. 인체의 신비란.


형. 어디 갈래요. / 그 온천 가자 온천. 노천온천. / 오케이.

씻고 나와서 일단 심향1으로 갔다. 빨래를 맡기고 나오니 스님이 누룽지를 권하신다. 형은 그걸 또 먹었다. 그래서 나도 세 숟갈 먹었다. 스님께서 어디 갈 거냐 물으셔서, 싸이 응암 노천온천에 갈거라 하니 극구 말리신다. 밤에 가면 공짜로도 가는데 뭐하러 낮에 가냐면서 대신 퓨리 빠이 리조트를 권해주셨다. 여기서 커피 한 잔 하고 수영도 하고 그러라고. 친절하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가는 길을 알려 주셨다. 공항쌀국수 지나서 좌회전.

나이 지긋하신 스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 있나. 계획을 변경하여 퓨리 빠이 리조트로 갔다. 그러고 보면 관광객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여서인지, 빠이에는 언어유희가 들어간 상호명이 많다. 호텔 빠일리포니아, 빠일리델피아, 퓨리빠이 리조트 등. 가보니 퓨리빠이는 리조트가 아니라 빌라였다. 빌라와 리조트의 차이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름이 빌라였다. 카페는 오픈 전이었지만 들어가 구경할 수는 있었다. 한 바퀴 둘러보니 수영장이 그럴듯했다. 나는 오픈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형은 맘에 안 드는지 바로 나가자 했다. 온천을 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

구글 지도를 켜고 이동. 곧 큰길이 나왔다. 60킬로가 넘게 밟다 보니 신나면서도 겁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지도를 보느라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운전하니 불안한 것이 당연했다. 거치대가 있으면 좋으련만. 어쨌든 열심히 가는데, 어느새 형이 뒤따라오지 않고 있다. 한적한 곳에 오토바이를 세울 때쯤 보이스톡이 왔다.


형 왜 안 와요. / 야 나 뒷바퀴가 펑크 났어. / 아… 그럼 어떡해야 되지? / 일단 일루 와봐바.


스쿠터를 돌려 형에게 갔다. 다행히 펑크가 났어도 움직이긴 움직였다. 조심조심 온 길을 되돌아갔다. 60킬로로 왔던 길을 20킬로로 돌아가려니 오래 걸렸다. 물어물어 수리상을 찾아가 수리했다. 수리비 120밧. 싸다 싸.

수리를 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형. 뭐 좀 먹을까요? / 그래. 우리 버거 먹으러 가자. 여기서 유명하다는 버거퀸. / 거기 지금 닫았을 텐데. 일단 가보죠.


예상대로 닫혀 있었다. 그래서 맞은편의 옐로 썬 빠이에 갔다. 둘 다 참치 볶음밥을 시켰다. 이 나라가 밥을 잘 볶는다. 싹 다 긁어먹었다.

밥 먹으면서 빠이에 오토바이 핸드폰 거치대를 파는 곳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지도를 보며 길을 외웠다. 좀 돌아가긴 해도, 큰길로 쭉 가다 우회전해서 또 쭉 가면 되었다. 다시 온천으로. 이번엔 별 탈 없기를.


큰길로 계속 달렸다. 큰 문제없이 국립공원 도착. 입구에선 들은 대로 220밧의 입장료를 냈다. 가파른 오르막 내리막을 여러 번 오르내리니 온천이 나왔다. 생각보다 사이즈가 작다. 온천 앞에선 20밧의 입장료를 또 받고 있었다. 입장료를 2중으로 부과하는 것이 아닌가 따져보려다 말았다. 고작 800원인데 그냥 내고 빨리 들어가는 게 낫지.

탈의실은 있되 락커는 없었다. 대충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옷은 벤치에 두었다. 온천은 생각보다 안 따뜻했다. 미지근하여 다만 춥지 않은 정도. 물이 깨끗하여 바닥까지 다 보였다. 그러나 깊이가 너무 얕아서 수영하고 놀긴 힘들었다. 물에 몸을 담근 지 5분 만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졌지만 낸 돈이 아까워서 더 있었다. 한국어를 쓰는 모녀가 들어와서, 내가 먼저 인사했다. 우리와 같은 심향2에 묵는 분들이었다. 어머니의 나이는 마흔다섯. 세상에. 희형보다 젊으셨다. 딸은 스물. 모녀는 마치 친구처럼 친했다. 보기 좋았다.

복귀할 시간. 뚫린 길에 차가 없어서 스쿠터 타기엔 너무 좋았다. 신나게 밟다 보니 금방 돌아왔다. 빠이는 오토바이 타는 재미가 반이다. 반드시 스쿠터를 빌려야 한다. 심향1에 돌아오니 아까 맡긴 빨래가 바구니에 그대로 있다. 온천 다녀오며 생긴 빨래와 함께 돌렸다.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해먹에서 쉬었다. 형은 자고, 나는 맥주 마시며 글을 썼다. 그사이 우리와 같은 날에 온 기님이 옆에 와 누웠다. 한국인이 반가웠는지 원래 성품인지 몰라도 계속 말을 걸고 질문을 했다. 아. 나 여행기 써야 되는데. 그렇게 일방적 질문과 건성 대답이 이어지는 동안 희형이 깼다. 형은 기님과 몇 마디를 나누다, 문득 나보고 장기를 두자 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형, 저녁 내기? / 콜! 


연소자라는 이유로 초를 잡았다. 군대 있을 때 나는 초를 잡고 진 적이 없다. 가뿐하게 이겼다.

저녁은 낮에 못 먹은 버거퀸. 가장 비싼 버거인 스페셜 더블 퀸 - 그래 봐야 165밧 - 두 개와 감튀 하나를 시켰다. 감튀가 바삭하고 고소했다. 버거 패티는 육즙이 가득했다. 뉴요커가 부럽지 않은 맛. 만족할 수밖에 없는 가성비였다.

다시 심향1으로 돌아와 빨래를 걷었다. 그동안 스님이 오셨다.


거 내일 임교수 떠나서, 오늘 저녁 삼겹살이랑 고등어 굽고 동태탕 끓일 테니 저녁 같이 드시지. / 예, 알겠습니다. 스님. 몇 시까지 오면 될까요. / 일곱 시에 오셔. / 예.


누가 온다고 먹고, 누가 간다고 먹으면 안 먹을 날이 얼마나 되나. 아마 연중 며칠 안 될 거다. 모든 나날을 특별히 여기시는 스님.


일곱 시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마사지받을 타이밍이다. 형은 숙소에서 쉬겠다 했다. 홀로 PTTM에 다시 갔다. 오늘은 시간이 되니 한 시간 반. 희한하게 어제보다 덜 시원했다. 분명 열심히 하시는데 아팠다. 너무 세게 받았나. 팁은 마침 20밧 지폐가 한 장뿐이라 20밧만 드렸다.

주류판매점에서 소주와 맥주를 샀다. 싸게 입을 옷이 없을까 해서 심향1 근처 만물상에 갔다. 별 거적때기 같은 옷들이 다 있었다. 심지어 옛날 한국 군복도 있었다. 한국의 의류수거함에 버려지는 옷들이 이리로 흘러오는 건가? 쓰레기 더미를 뒤져 20밧짜리 나시티를 하나 샀다. 800원.

심향1은 술자리가 한창이었다. 나도 한 자리 잡고 앉았다. 연일 삼겹살 파티라니. 서울에서보다 두 배는 잘 먹는 것 같다. 오늘 멤버는 여섯 명. 어제 멤버에다 기님이 추가되었다. 범울 커플을 제외하고는 모두 솔로 노총각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연애를 걱정해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빈 말이라도 누구 하나 소개팅 시켜주겠다는 말조차 없었다. 아마 피차 해줄 사람들이 없을 거다. 나는 수년 전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해 겪었던 이야기를 했다. 오로지 봉변으로 가득한 이야기인 만큼 다들 재밌어했다.

식사 후에는 자리를 옆으로 옮겨 2차를 했다. 노총각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도중에 남자 한 분이 더 합류했다. 노총각들로 가득한 도시. 희형은 여기에 5일 이상 머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나도 그랬다.

"오늘 토요일인데 모조 바 한 번 가 보세요. 토요일마다 출근하는 매력적인 태국인 여성 보컬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 동네 지금 완전 핫할 거예요. 스쿠터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 어쩌면 한국인 여자분들도 있을지 몰라요!"

우리가 기운이 빠져 보였는지, 울님이 모조 바를 권했다. 기대는 없지만 안 가본 곳이니 가보기로 했다. 인사하고 나왔다.


들은 대로 그쪽엔 사람이 많았다. 길이 막힐 정도는 아니지만 빠이의 그 어느 곳 보다도 많았다. 전부 백인이라, 우리가 어울릴 분위기는 아니었다. 모조 바의 그녀는 오늘 출근을 안 한 듯했다. 같은 동남아 안에서, 나는 다녀온 곳 중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하노이. 그래. 나에겐 하노이가 넘버원이다. 백인들 노는 것 방해하지 않고 심향2로 돌아왔다. 오다 보니 빠이가 하노이보다 나은 게 있다. 스쿠터. 스쿠터 타기엔 이만한 도시가 없지.

형은 바로 들어갔다. 나는 거실에 누워 맥주를 마시며 여행기를 썼다. 열두 시.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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