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피엔드 Sep 05. 2019

태국 여행기 6일 차

2019.7.14.

일곱 시 반. 간밤은 그럭저럭 잘 잤다. 형은 먼저 일어나 있었다.


뭐 좀 드셨어요? / 어. 부침개 맛있다 야. 좀 먹을래? / 괜찮아요. 망고스틴은 어때요? / 그거 다 썩었더라. 먹을 게 없어. / 우리가 애초에 썩은 걸 사온 건가? 아님 그동안 썩었나? / 모르지 뭐. / 그냥 망고나 실컷 사 먹어야겠네요. / 그러자. 망고 맛있더라.


부침개는 어제 마주친 옆집 모녀 중 어머니께서 주신 것이다. 형은 아침부터 기름진 것도 잘 먹는다. 남은 기간 동안 어디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았으나 딱 꽂히는 곳이 없었다. 형이나 나나 너무 우유부단하다. 일단 오늘 갈 곳부터 정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심향1으로.

심향1에는 스님만 나와 계셨다. 스님은 우리를 보자마자 도토리 쫄쫄면을 먹으라 주셨다.


이거 뭐 새로 나왔길래 사 왔는데 맛있는가 함 무 봐요. / 아이고 스님.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벌써 나갔나요, 아님 아직 안 일어났나요? / 거 아직 다 자고 있지 뭐.



나는 도토리 쫄쫄면을 이미 먹어보아서 맛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얻어먹기 위해 잠자코 있었다. 형이 라면을 끓이는 동안 나는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월남 파병 가셨던 얘기, 전 세계 돌아다니며 공장 영업하신 얘기, 부산에서 신문사에 칼럼 쓰시던 얘기, 그러다 알게 된 여기자와 결혼을 했던 얘기, 아이를 낳고 광고회사를 하다 사기당한 얘기, 애 둘을 낳고 이혼하여 다시 스님이 된 얘기, 여기서 만나 결혼한 커플들 얘기, 여기 와서 바람난 사람들 얘기, 성철 스님 얘기, 최근 불교계 얘기 등 온갖 이야기가 라면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서도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부산 사투리가 심하셔서 잘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그러는 동안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하루 종일 스님 말씀만 듣고 있지 않으려면 우리라도 나서야 한다. 어디에 가면 좋을지에 대해 또 한참 들은 뒤 길을 나섰다. 갈 곳이 많으니 우선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웠다.


첫 번째 목적지는 빅 붓다. 남동쪽 산 중턱에 있어 빠이 시내에서도 보인다. 스쿠터 타고 가니 금방 도착. 그런데 복장 규정을 생각 못했다. 나시티 반바지에 쪼리 차림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마침 옆에 옷을 빌려주는 곳이 있어서 물어봤더니 남자는 상관없단다. 복장 규정은 짧은 하의를 입은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듯했다.

계단이 많았다. 다리가 뜨거워졌다. 숨이 차올랐다.


어우. 오늘 발마사지 좀 받아야겠는데? / 이따 함 가시죠. / 진짜 여행도 이거 나이 들면 힘들어서 못 하겄다. / 그러니까. 다 때가 있어요.


위에 올라가니 빠이 시내가 다 보였다. 불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절을 했다. 힘드니까 한 번만.

다음은 빠이 캐년. 네비 찍고 가는 도중 길가에 코끼리 캠프가 보여서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가까이서 보니 무서워서 너무 다가가진 않았다. 사진 찍었으니 보답으로 코끼리 밥이라도 사드릴까 했으나 아무도 우릴 신경 쓰지 않아 그냥 나왔다. 코끼리가 먹어대는 양이 무지막지할 텐데, 이렇게 사진 찍는 사람한테 삥조차 뜯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키우는 걸까.

다시 캐년으로 가는 길. 이번에는 빠이 히스토리컬 브릿지가 나왔다. 스쿠터를 세워두고, 철골 구조에 나무 바닥인 오래된 다리 위를 걸어서 왕복했다. 솔직히 별 거 없다. 이런 곳까지 관광명소로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빠이가 얼마나 시골인지를 보여준다. 빠이에 뭐 대단한 볼거리를 기대하고 와선 안된다. 여긴 그런 곳이 아니다.

다시 스쿠터를 타고, 마침내 빠이 캐년 입구. 주차장에서 100미터 정도는 걸어 올라가야 했다. 오늘은 꼭 발마사지를 받으리라. 빠이 캐년은 생각보다 컸다. 발을 헛디디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서,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선 좁은 길을 건너기가 무서웠다. 형은 그랜드 캐년에 비하면 애들 장난 같다 했다. 에이. 형 그렇게 비교하면 안 되죠.

협곡을 보고 내려오니 목이 말랐다. 음료를 마시러 간 곳에서 밥까지 시켰다. 딸기 셰이크, 망고 셰이크, 볶음밥, 팟타이 까지 다해서 170밧. 태국에선 어딜 가도 싸고 맛있다.

다음은 팜복 워터폴. 폭포로 가는 길은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저속으로 조심조심 이동했다. 도중에 짚라인과 랜드 스플릿이 보였지만, 안 해보고 안 가봐도 될 것 같아 지나쳤다. 폭포도 길에서 내려 조금 걸어 들어가야 한다. 폭포는 생각보다 컸고, 그 앞의 물 웅덩이는 다이빙을 할 수 있을 만큼 깊었다. 백인 여러 명이 수영하고 있었다. 나는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물이 그리 깨끗하지 않아 후회를 철회했다.

밤부 브릿지는 폭포에서 좀 더 들어가야 나온다. 시골마을 논밭 위에 대나무로 고가도로 같은 걸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해 두었다. 길의 끝에는 사원이 있지만, 대단한 규모는 아니다. 차라리 밟을 때마다 대나무가 내는 소리와, 발을 통해 전해지는 대나무의 탄력이 이곳의 주요 콘텐츠다. 밟는 맛이 있다. 한 바퀴 돌고 나왔다.

삽시간에 여섯 포인트를 찍었다. 서른아홉과 마흔여섯 남자에겐 가혹한 일정이었다. 이제 들어가 쉬어야 한다. 심향2로 돌아가는 길. 스쿠터 라이딩은 정말 신난다. 왜 유난히 신날까 생각해보니, 빠이는 길에 비해 차가 많지 않고, 신호등도 별로 없다. 그러니 스쿠터 타다가 답답하게 멈출 일이 잘 없다. 물론 스쿠터가 애초에 재미있는 탈것이기도 하지만.


심향2 도착. 각자 씻고, 누워서 조금 빈둥대다 나왔다. 발마사지 받으러. 먼저 PTTM을 찾아갔는데, 예약이 풀로 차 있어서 받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Masterly massage에 갔다. 한 시간 발 마사지를 받았는데, 여기도 잘했다.


형. 시원하지 않아요? 완전 잘하는데 여기도. / 시원하긴 한데, 남이 날 만지는 그 느낌이 싫어.


아니 어떻게 그게 싫을 수 있지. 마사지 성애자로선 정말 이해할 수 없다. 팁으로 40밧씩 주고 나왔다.

저녁은 그냥 길거리 음식들로 때우기로 했다. 만두 같은 것을 먹고, 꼬치를 먹었다. 교자까지 먹고 나서 여기 음식은 실패가 없다며 감탄하던 차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처마에서 비를 피하다, 그냥 맥주나 한 잔 하기로 하고 duang restaurang으로 들어왔다. 간판에 한자로 행운반점이라 쓰여 있어서 차이니즈 레스토랑인가 했는데, 메뉴를 보니 태국음식 중국음식 피자 햄버거 다 파는 집이었다. 피자 한 판과 맥주 두 병을 시킬 즈음 비가 좀 그쳤다. 타이밍 보소. 맥주가 먼저 나오고 좀 있다 피자가 나왔다. 피자 맛은 솔직히 냉동피자 느낌이었다. 어쩌면 진짜 냉동피자였을지도 모른다. 근데도 200바트면 절대 싸지 않다. 다시 가고픈 집은 아니다.

비가 얄궂게도, 우리가 음식을 다 먹을 때쯤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숙소에 돌아왔다. 그랬던 비가, 숙소에 도착해 젖은 옷을 벗어 말릴 즈음엔 완전히 멎어버렸다. 허허.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내일 이후로 계획이 없다. 일단 심향의 숙박을 이틀 연장했다. 그다음엔 어디서 뭘 할까. 치앙마이 방콕 파타야 등을 검색해보았다. 눈이 감겨서 시계를 보니 열 시. 오늘 많이 움직였지 참. 일찍 누웠다.

작가의 이전글 태국 여행기 5일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