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피엔드 Sep 06. 2019

태국 여행기 10일 차

2019.7.18.

일곱 시 반에 깼다. 어제 못 쓴 여행기를 썼다. 

그동안 형은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이름 모를 태국 여인과 함께.


마지막까지 노총각끼리만 놀다 갈 순 없다는 생각에, 어제 치앙마이에 도착하자마자 틴더를 켰다. 하트가, 하도 남발했더니 금방 바닥나 버렸다. 나는 형에게도 틴더를 권해드렸다. 형은 나보다 더 빨리 하트를 소진했다. 그런데 그중 누군가와 매칭이 된 것이다.


형은 처음부터 나에게 물었다. "야. 얘 혹시 레이디보이 같냐?" 보아하니 안경도 끼고 화장도 수수한 것이 레이디보이 같지는 않다. "에이. 형 이건 여자지." 형은 신나서 메시지를 계속했다. "얘 너무 귀여운데?" 나도 몇 명과 매칭이 되었으나, 메시지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맥주나 마시며 여행기를 썼다. 그러는 동안 계속 실실 웃으며 메시지를 주고받던 형이 갑자기 경악했다. 왜인가 봤더니 이런 메시지가 와 있었다. I'm a ladyboy. 아니 무슨 레이디보이가 이렇게 수수하대. 형. 힘내요.


아홉 시 십오 분. 조식 먹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특이하게도 뷔페가 아니었다. 형은 미국식 볶음밥을, 나는 볶은 마늘+돼지고기 밥을 시켰다. 빵, 주스, 커피 or 차, 우유, 밥, 과일까지 완전히 풀코스였다. 내가 시킨 메뉴는 돼지불백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맛이 좋았다.

다시 숙소로 올라와 뒹굴뒹굴. 밖은 덥고 안은 시원하니 나가기가 싫다. 우리는 틴더를 하며 레이디보이 구별법을 익혔다. 우리의 깨달음을 글로 남긴다.


남자같이 생겼다 => 레이디보이
키가 크다 => 레이디보이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 레이디보이
성형한 느낌이 난다 => 레이디보이
화장이 과하다 => 레이디보이
화장을 잘했다 => 레이디보이
피부가 하얗다 => 레이디보이
예쁘다 => 레이디보이
많이 예쁘다 => 무조건 레이디보이
섹시하다 => 레이디보이
매력적이다 => 레이디보이
몸매가 좋다 => 레이디보이
좋은 몸매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 100% 레이디보이
우리에게 하트를 보낸다 => 의심할 여지없는 레이디보이


그래도 마냥 호텔에만 있을 순 없지. 사원에 가기 위해 긴바지를 입고 나왔다. 오늘 목적지는 도이수텝. 일단 타패 문으로 가서 썽태우를 타야 한다. 구름도 없고 그늘도 없었다. 햇빛이 살에 닿으면 그 따가움이 촉각으로 느껴졌다. 5분 만에 등이 다 젖었다.

빨간 썽태우를 타고 먼저 동물원으로 갔다. 동물원을 거쳐 가는 것이 도이수텝에 가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라고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보았다. 썽태우는 합석되는 택시라고 보면 된다. 군대 육공트럭처럼 옆으로 늘어서 앉게 되어있다. 좌석이 열악하고 길을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대신 가격이 싸다. 동물원까지 인당 50밧.

동물원에는 도이수텝으로 가는 썽태우가 줄지어 있었다. 원래 열 명을 모아서 1인당 왕복 80밧씩 받고 가는데, 사람이 우리 포함 넷 밖에 없으니 기사님이 먼저 우리에게 '이 멤버 그대로 1인당 왕복 150밧에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그래 봤자 육천 원 씩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도이수텝까지는 20분 정도 걸렸다. 기사님은 그 자리에 한 시간 기다릴 테니 그동안 안을 둘러보고 오라 했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보고도 남는단 말이렷다. 지금이 두 시니 세 시 전까지 오면 된다. 출발.

먼저 티켓을 샀다. 입장료 30 + 엘리베이터 20 = 인당 50밧. 엘리베이터에서는 에어컨이 나왔다. 잠시나마 반가웠다.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계단이 까마득하다. 그 긴 계단을 스님들은 모두 걸어서 올라오고 있었다. 아. 이 날씨에는 저것만으로도 대단한 수행이 될 것이다.

도이수텝 사원은 한국의 절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일단 면적이 더 좁은 대신, 훨씬 더 압축적이다. 노는 공간이 거의 없다. 바닥은 맨땅이 아니다. 다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사원의 진짜 내부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바닥이 달구어져서 발이 몹시 뜨거웠다. 금인지 도금인지 아님 금색을 칠한 건지 몰라도, 거의 모든 불상이 금빛이었다. 사원 중앙에는 황금색 구조물이 있어 사람들이 경배 중이었다. 경건한 불상들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도 될까 잠시 망설였지만, 남들이 다 찍어서 나도 찍었다. 날씨가 아주 더웠다.


다 봤다. 시원한 엘리베이터 한 번 더 타고, 처음 내렸던 장소에 도착. 두 시 오십육 분. 그래. 여긴 한 시간 코스가 딱 맞다. 썽태우를 타고 동물원으로 돌아갔다가, 같은 기사님께 얘기해서 아예 타패 문까지 와 버렸다. 게다가 인당 40밧으로 갈 때보다 싸게.


세 시 반. 점심을 잊고 있었다. 어제 봐 둔 맛집을 갈까 하다, 날이 너무 더워 근처의 에어컨 나오는 식당으로 갔다.


'아시안 루츠. 일단 깔끔한 내부에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것만으로도 올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닭고기 볶음밥과 버섯 새우볶음을 시켰다. 음식도 예쁘게 나왔다. 단, 맛은 그냥 무난한 수준이었다. 여러 가지 과일이 섞인 주스를 시켰는데 무척 상큼했다. 밥 다 먹고 느긋하게 주스를 마시다 보니 더위가 가셨다. 별점 4.'

라고 트립 어드바이저에 올렸다. 올리면 5% 할인해 준다 해서. 11밧만큼 할인받았다.

숙소로 들어오기 전에, 형은 나더러 오늘 좋은 델 갈 예정이니 면도 좀 하라 했다.
"꼭 해야 돼요?" 나는 열흘 남짓 기른 수염이 조금 아까웠다.
"어. 해야 돼. 그거 내가 보기에도 지저분한데 여자들이 보면. 어우." 형은 단호했다. 대체 어딜 가길래. 편의점에서 면도기, 왁스, 스프레이를 샀다. 안경점에서 원데이 렌즈를 샀다.

숙소로 돌아왔다. 맥주 한 잔씩 하고 잠시 쉬었다. 면도하고, 렌즈를 끼고, 머리를 넘겼다. 옷은… 옷은 준비해온 게 없어 그냥 입던 티셔츠에 반바지. 그나마 이게 최선이었다.

형과 함께 그랩을 타고 찾아간 곳은 반 사타폰. 도무지 한국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한국어로는 아무리 검색해도 안 나왔다. 택시가 멈춘 곳이 너무 어두워서 처음엔 우범지대인 줄 알았다. 한 바퀴 돌고 형이 가자고 한 집은 에어컨도 안 나오는 야외 맥주집.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다. 창 비어 둘, 감자튀김 하나. 그런데 주문하며 보니 서빙하는 종업원들이 꽤 귀엽다. 오. 이래서 형이 오자 했구나.

곧바로 맥주가 나왔다. 이럴 수가. 620ml 빅 사이즈다. 이게 70밧 밖에 안 한다고? 슈퍼에서도 55밧에 파는데? 그렇게 저렴하게 팔면서도, 종업원들은 우리 잔이 빌라치면 어느새 다가와 맥주를 채워주었다. 그럴 때마다 합장하며 "코쿤 캅~" 했더니 어떤 직원이 웃으며 태국어로 뭐라 뭐라 했다. 아마 "매번 그렇게 인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같은 의미였으리라. 태국 말을 못 알아듣는 우리가 영어를 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부끄러워 아무 말 못 하는 모습. 그녀는 외국인 손님을 처음 접한 듯했다. 극단적으로 상업화된 나나플라자와는 정반대의 분위기.

허나 그게 다였다. 취기가 오를 즈음, 한 종업원에게 '어떻게 하면 같이 이야기하며 마실 수 있냐' 물었더니, 그건 가능하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이야. 나는 별 기대가 없어서 괜찮았지만, 희형은 딱지 맞은 것에 충격이 큰 듯했다. 형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원할 경우 같이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다 했다. 형. 그 정보 제공자 혹시 존잘러 아닙니까? 존잘은 원래 다 되잖아요. 마상을 입은 형과 함께 나왔다. 둘이 마신 술값이 팁까지 해서 340밧. 싸도 너무 싸다.


근처의 다른 집을 가 보았다. See you. 술값과 시스템은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여긴 열정적인 여사장님이 계시다는 게 달랐다. 스물여섯 그녀는 영어도 잘하고 똑똑했다. 우리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계속 와서 말을 걸고, 말을 들어주었다. 그렇다고 술을 더 권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를 편안케 해줄 뿐. 그녀는 그렇게 우리뿐 아니라 모든 테이블을 관리했다. 동남아시아의 작은 도시 변두리에서 소박한 술집을 운영하는 사람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는구나. 나는 조금 감명을 받았다. 술값이 333밧 나왔는데, 팁을 더해 400밧을 드렸다.

다시 그랩을 타고 돌아왔다. 방에서 한 잔 더 할 생각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사 왔지만, 희형이 갑자기 취해 있었다. 씻고 누우니 열두 시 반. 나도 졸리다.

작가의 이전글 태국 여행기 9일 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