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불어넣는다'는 표현의 시각적 형상화
몇년 전부터 런던에서 막이 올려진 연극 War Horse에 대한 아성은 이미 들어왔지만, 직접 보러 가야겠다 맘을 먹은 건 올해 3월 12일로 런던 공연의 막이 내리면 (물론 다른 도시 투어가 아직은 있다) 2017년 9월이 되어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이 실상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이 공연이 '말'이라는 대상에게 숨을 불어넣는 방식이 이 연극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었으리라.
'연극적 허용'은 무대에서 적용될 때 빛이 난다. 영화에서는 그 표현방식을 사용하려면 처음에 그 장치에 대한 부연설명을 충분히 해주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연극에서도 그런 부연설명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연극 무대에서의 관객보다 그 허용을 받아들일 준비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관객에게 스크린에서의 연극적 허용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노력은 배가 될 거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게 무슨 의미고 저게 무슨 의미고..라고 말이나 글 등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심각하게 작품은 촌스러워진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법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동선이나 관계로 알려주면 보는 사람도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게 시작이다.
말의 움직임 자체를 관찰하고 재현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서 인형을 택한 건 연출에게는 신의 한수였던 게 아닐까. 세계 연극계에서 정말 주목할만한 작품이 나왔으니.
2016년 3월 12일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talk과 공연을 모두 예약했다. 우리나라에서의 '관객과의 대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talk'은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여서 우리나라랑은 다르게 공연을 만든 연출부과 작가, 미술, 엔지니어, 음악 등의 순수 스탭으로만 이루어져 공연을 준비한 과정에 대한 설명부터 질의응답까지로 구성되었다. 배우는 무대에서 표현해내는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하지만, '작품'에 방점을 둔다는 접근 방식이 우리나라와는 달랐다.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놓은 사람들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하지만, 그 과정은 새로운 시도와 실패를 무수히 거친다. 그리고 한 작품이 하나의 연결성을 갖기 위해 여러 요소는 유기적으로 이루어진다. 연습 중에 어느 씬에 들어갈 만한 음악을 그 때 그 때 만들어내는 거라던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미술, 그리고 소품들이 숨을 쉬게 되는 모든 작업 과정들이 그랬다.
특히,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못 차리고를 한참 고려하다 못해 알아채길 바라며 '말이 숨을 쉬고 있다'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도 신선했다. 그래, 저게 관객의 온전한 즐거움으로 느껴지게끔 숨겨놓는 게 진짜지. 구차하게 하나 둘씩 설명할 필요는 없고 그게 관객이 알아채게 두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해보였다. 단순하게는 말 안에서 말을 움직이는 퍼펫티어가 다리를 구부렸다폈다 하는 것이었는데, 말의 움직임을 보는 사람들이 연극을 보는 중에 옆사람을 톡톡치면서 '야, 저거 봐. 말이 숨을 쉬고 있어'라고 알아채는 관객이 있을 정도로만 살짝 집어넣었다고 한다. 너무 움직임이 클 경우에, 은근하게 알게 하려는 의도 자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 여기서 이런 배려를 통한 섬세함이나, 관객의 시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관객은 무식하지 않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해석은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것보다 더 형이상학적일 수도, 더 숭고한 것일 수도 있다. 각 사람마다 알아채는 부분과 빈도의 수가 다른 것일 뿐. 가르치기 시작하면 보는 사람은 기분이 상하는데, 그런 쓸데없이 친절한 작품은 늘 있기 마련.
아이들의 책 안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동물을 통한 가족애 등을 그린 이 작품은 작가의 의도보다도 더 세련된 방식으로 무대에 구현되었고, 작가는 '내가 책 쓰기 전에 연극이 있었다면, 나 책 더 잘 썼을 거야'라고 불평할 만큼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실제로 계속 연극을 보다보면, 까마귀든 거위든, 말이든 옆에서 그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퍼펫티어는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됨과 동시에 그 인형들이 살아움직인다.
이미 평단에서 많은 이야기를 써두었을 것이라 내가 이 작품에 대해 논하는 건 뭐가 그리 중요하겠나, 그냥 그 감흥을 조금 보탤 뿐이지. 작품에 대한 관점이나 실제로 그 극이 만들어지기까지 그들이 수고했을 과정들이 고스란히 무대에서 전해진다는 건, 참 뿌듯한 일일 것이다. 믿고 보는 NT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이번에 공연된 <As you like It>을 놓친 게 엄청나게도 아쉬운 건 당연히 그 National Theatre에서 공연되는 작품들은 그만큼 보장된 퀄리티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거다.
말과 헤어져야 할 배우들이 눈물을 훔치는 것이나 아쉬워하는 모든 스탭들이 전부 무대에 올라 인사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궁금해지는 건 역시 관객이다. 커튼콜 때 모든 관객이 기립박수를 치고, 작가의 손짓에 맞추어 국가를 부르는 이 사람들은 진짜 관객인 건가, 관계자인 건가. 옆자리에 앉은 (동시에 티켓을 예약하는 바람에, 나 때문에 할머니와의 데이트가 아쉬워진) 할아버지와, 어린 딸을 데리고 마지막 공연을 찾은 어머니까지, 아직까지 여기서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