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어떤 계획도 제대로 하질 않은 채로 또 다시 출발이다. 그러지 말자고 몇번이고 스스로를 채근했음에도 여전히 그 상태로 공항 체크인 카운터에 선다.
나의 국적을 북한으로 표기해준 라이언에어 덕분에, 체크인 창구에 있는 직원에게 물어보려 티켓을 보여줬더니만 늘상 있는 일처럼 별 일 아니라는 듯 별 것도 없는 프린트된 티켓에 'VISA CHECKED'라고 써서 무심히 준다. 멍해진 나는 직원 얼굴 한 번, 티켓 한 번 쳐다보고 보안검색대로 향한다. 이미 배낭이 무거워 벌써부터 어깨가 쳐지는 바람에 무거운 걸음으로 게이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행시간 자체는 약 3시간 정도였지만, 도착하니 7시, 쉬엄쉬엄 비앤비 주인장과 만날 시간에 맞추어 숙소에 도착하니 9시가 되었지만 아직 해가 덜 지는 걸 보니 여름이 된 게 확실했다. 디에고라는 주인은, 친절하게도 마드리드 시내의 가볼만한 곳들을 설명해주었고, 걸어갈 수 있는 시내 길을 익히려 짐을 놓고 밖으로 향했다. 밤거리를 쏘다니다 보니 숙소에 다시 들어온 시간이 1시. 모르는 동네를 휘젓고 다니기엔 너무 위험한가, 싶다가도 난 매번 길을 휘적거리며 종횡무진 걸었다.
예상 외로 마드리드는 현대적 이미지가 강했다. 나에게 '마드리드'로 형상화되었던 도시의 이미지는 투우사의 옷과 빨강 노랑이 형형색색 수놓아졌을 고전적 그림이었다면, 실제 만난 마드리드는
왠지 모르게 더 정적이고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을 만난 느낌이었달까. 아무튼 오기 전 겁을 먹었던 집시를 만날 일도 별로 없어보였다. 히잡을 쓴 사람들 몇몇이 구걸을 하기 위해 다가온 것 말고는 집시라 할 만한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튿 날, 마드리드에 그리 오래 있을 게 아니어서 좀 무리이지 않을까 싶었던 톨레도행을 감행했다. 오전에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들러 피카소의 작품, 달리의 작품을 보고 나와 느즈막히 출발한 톨레도는 조금 더 스페인의 고전적 이미지와 더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탁 트인 시야와 더불어, 역에서 한 눈에 전체적인 도시의 느낌이 그림처럼 다가왔다.
버스를 탈 걸 싶게, 생각보다도 소코토베르 광장까지 가는 길은 오르막길을 한참 가야했다. 덕분에 톨레도 구석구석을 돌 수 있어 알록달록 예쁜 집들을 마주했다. 세고비아와 톨레도 둘 중에 어느 도시를 다녀올지 고민하던 건 도시 경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걸로 싹 잊혀졌다. 이래서 유네스코에 등재된 도시라는 거구나, 오히려 마드리드에서 예상했던 고전적 이미지는 톨레도에서 완성되었다. 발코니에 장식된 꽃들과 아기자기한 숍들이 작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운치를 더해주었고, 어딜 가나 모여있는 흰 머리들의 관광객 무리가 날 더욱 이 곳의 이방인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래도 그 안에서의 생경함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나 홀로 서 있는 광장은 내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해도, 나에게 이질적인 곳이 아니었다.
이제야 시작하는 여행이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것처럼 내 비어 있는 일기장이 겹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완성되지 못한 과업과, 미루어두었던 일기. 머리 속에서 맴도는 계획과 쓰여지지 못하는 계획서. 왜 당장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은 발걸음을 어디로 내딛어야 할지를 결정하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당장 행복할 순간을 경험하지 못하는 걸까. 결정 덕에 다른 도시에, 다른 공간에서 하루를 살고 다시 거처가 아닌 곳에 짐을 풀고, 또 다시 짐을 싸고 이동하고. 결국은 모두가 이리도 나그네로 사는 건데도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애를 쓴다.
현대와 과거를 아우르는 두 개의 도시를 순간이동과 같이 경험하면서,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기보다는 지나가는 초침과 같은 과거, 현재 숨쉬는 순간, 그리고 곧 다가올 순간을 맞이하는 것처럼 매일을 사는 것이 더욱 더 가깝게 느껴진다.
여행은 아쉬움으로 늘 끝이 난다. '다음에 또 올 이유가 생기겠지'라는 아쉬움으로 돌아선 그 자리에, 기억보다도 더 강하게 남을 그 곳의 냄새와 햇살이 나에게 촉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순간, 다시 그 곳으로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