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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 Aug 27. 2016

그라나다, 이슬람의 삶을 그려내다

스페인과 이슬람의 묘한 공존

  그라나다에 갈 땐 알함브라 궁전을 꼭 들러봐야 한다는 일념같은 건 없었다. '알함브라의 나스리궁은 예약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 정도의 소문만 들어놓은 터였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궁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예매해두고, 날짜에 맞추어 적당하게 싼 숙소를 찾았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숙소는 싼 가격만큼 깨끗하지 않았고(잠시나마 베드버그가 침대에서 튀어오르는 환영같은 걸 봤다. 실제는 아니었지만 그건 환상같은 거였으려나.) '로맨틱하게 옥상을 쓸 수 있다'는 말과 일맥 상통하는, '가방을 들고 건물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야하는' 그런 집이었다. 호스트는 여자 한번 꼬셔보고 싶어서 숙박하는 사람을 받는 것 같은 전형적인 홀로 사는 스페인 아저씨였고, 그렇게 그라나다의 숙소에서 받은 첫 인상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더랬다.



  그래도 숙소를 나와 굽이굽이 골목길을 따라 마주친 이슬람 사람들 특유의 기념품을 판매하는 길에 다다랐을 때, 그 인상은 조금 달라졌다. 이 때까지 보았던 스페인의 느낌이 아닌 아랍 특유의 것이 섞여 이국적 분위기를 내었기 때문이다. 곳곳에 있는 케밥집과 시샤(후카라고도 하는 물담배)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 그라나다의 길엔 작은 아랍이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스리궁 입장시간에 가까웠기 때문에 짐을 풀자마자 바로 알함브라로 향했고, 난 또 잘 알지도 못하는 길을 지도도 보지 않고 동네처럼 무조건 직진해 가기 시작했다. 알함브라 궁전엔 일단 가야했으니까. 가는 족족 발견한 표지판을 확인하고 가다 서다를 반복해 티켓오피스 발견! 다행히 입장시간에 맞추어 나스리궁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만난 정원의 풍경도 충분히 보면서. 알함브라 자체가 높은 지대에 있기도 했지만, 나스리궁을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 길에서는 그라나다의 전망이 한눈에 펼쳐져 있었다.



  나스리 궁에 들어서자 사람들 모두 숨을 죽이고 조용히 궁 안을 둘러보았고, 들리는 소리는 가이드의 설명과 사람들의 감탄소리 뿐이었다. 물의 정원, 궁전 안의 타일 장식, 분수대의 조각 등은 그저 말없이 바라보고 소리없는 놀라움을 표현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궁전 안의 고요함이 방문한 나로 인해 깨질까 조심스러웠다. 궁전 안의 그 장식은 모두 정교하고, 이 넓은 궁전 안에 (물이 실제로 흐르기도 하지만) 물 흐르듯 모든 건축물과 정원, 모든 것이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으리라.



물, 물, 물.

이 때 당시 사람들이 일부러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두었다는 정원, 분수가 동양에서 오는 물에 대한 신념과 합치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우연은 아닐 거다. 동양과 서양이 묘하게 공존하는 이슬람의 문화에 스페인 특유의 것이 섞여, 더욱 특별한 느낌을 주는 곳이 이 곳 그라나다였고 그 중에 알함브라는 그 정수라고 할 수 있었다. 알함브라가 닫는 시간이 되어 길을 따라나오다보니 궁전 안의 정원인 헤네랄리페를 다 보지 못 하고 나와버렸지만, 이런 아쉬움이 남아야 그라나다를 다시 찾을 수 있겠지, 라는 합리화로 그 아쉬움은 마음에 묻기로 했다....라는 말은 나의 여행지에서의 '삽질'을 '로망'으로 바꾼다.



  그라나다에는 동굴 안에서의 플라멩코 공연이 있다고 해서 알함브라에서 내려오는 길에 발견한 동굴 플라멩코 공연장에서 티켓을 샀다. 사실 티켓을 사려는 생각이 먼저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내려오는 길에 어디선가 기타소리가 들려 따라 가보니 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는 플라멩코 댄서들이 있었다. 스페인의 길을 지나다니며, 몇몇 거리 공연을 봤지만 이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잡고 머물게 하는 힘이 있었다. 강한 발소리와 화려한 몸짓으로 사람들의 박수를 이끌어내는 이들의 공연에, 여기서도 플라멩코를 봐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동굴 플라멩코는 바에서 운영되는 곳이라 늦은 저녁에도 공연이 있어서 저녁에 바를 들르는 셈으로 공연을 보러 갔다. 그라나다의 플라멩코와 세비야의 플라멩코는 느낌이 다르다고들 하는데, 그라나다의 것이 좀 더 애환이 묻어나고 강렬한 느낌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세비야의 것과 비교도 할 겸 굳이 한번 더 보고 싶었다. 이미 길에서 본 그 플라멩코의 매력이 한 몫하기도 했고.


  거리의 플라멩코 댄서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댄서들과 끓어오르는 듯한 노랫소리, 그라나다의 플라멩코는 정돈된 느낌의 세비야의 것과는 또 달랐다. 그래도 그 중에 가장 좋았다고 할 만한 건 거리에서 본 플라멩코였지만, 그 것도 그 것대로의 느낌으로, 붉은 조명 아래서의 붉은 천을 두른 아름다운 그녀의 몸짓은 그라나다의 기억을 붉게 물들여주겠지.






  이튿 날 히피들의 마을, 집시의 언덕. 사크리몬테에 들렀다. 스페인의 산토리니라고 불리는 곳 답게, 거리는 흰색에 푸른 페인트를 칠한 집들이 그라나다의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였다.



  여전히 이 길이 맞는지, 여기가 종착역인지도 모른 채 길을 걷다 만난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이정표를 찾아 걷고 또 걸었던 그 거리엔 집시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만든 동굴과 그들의 삶이 길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길을 걷다 우연찮게도 다시 마주친 론다에서의 그녀와 타파스와 빠에야를 먹으며 샹그리아를 마시고 있자니 이번 스페인 여행은 예상치 못한 인연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여정과도 같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그라나다의 길을 걷다 마주치는 고양이처럼 흔하면서도 흔하지 않을, 그런 시간과 공간의 기억이 내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공존하길.



  어둠이 내려앉으면 언제 뜨거웠는지도 모르게 거리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광장에 앉아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 곁에 모여서 음악을 들으며, 노래를 하며, 그 때의 공기를 공유할 수 있는 여행의 시간은, 내게도 알싸한 바람 냄새와 함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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