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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 Aug 19. 2016

세비야, 그 찬란한.

강가에 드리운 반짝이던 태양의 그림자

스페인 여행의 3번째 도시는 세비야였다. 열정의 도시에 걸맞는 뜨거운 태양, 노란색으로 칠해진 예쁜 건물이 골목마다 말갛게 닦은 얼굴을 드러내는, 정갈하지만 정겨운 도시. 머릿 속에 생각나는 스페인의 인상은 실제 세비야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었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바르셀로나의 공연 일정을 제외하면 제일 오래 머문 곳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도 스페인 여행 중 왠지 제일 기대되는 곳이 세비야였다. 난 이 곳에서 가장 유명한 세비야 대성당과 스페인 광장, 그리고 이사벨 2세 다리, 투우장 곳곳을 다니며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어 반짝거리는 도시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빡세게 여행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라는 말을 자주 하던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움직이지 않을 뿐, 하루 종일 2만 보, 3만 보를 걸으며 도시의 길을 발바닥에 새겼다. 그러면서 다시 든 생각은 '사실은 이렇게 지칠 때까지 돌아다니는 게 내 원래 성격이었나'라는 것.


스페인 광장의 야경


그랬던 것 같다. 여행을 갔다하면 12시, 1시가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가던 게 비일비재했으니까. 한 번은 민박집에 묵었던 홍콩에서 밤 늦게 숙소에 들어가니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기다리던 그의 말이 왠지 기억에 생생한데,


"이렇게 늦게 다니면 안 무서워요?"


뭐, 무서운 줄 모르고 밤까지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나는 지금의 유럽에서도 똑같은 거였다. 실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스스로를 규정짓고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다보면, 내 자신은 없어지고 어느 새 사회가, 그리고 내 안의 기성세대의 생각이 요구하는 사람이 되어 있더라. 이걸 '깨달았다'고 말하기엔 그저 인정하지 못할 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알아도 말하지 않는 사실.


세비야에서 지내는 동안 잠시 짬을 내어 다녀온 론다는 세비야와는 너무나 다르게 비가 오고 추운 날씨였지만, 세비야보다 작은 길들이 촉촉하게 젖어 더 예뻤다. 예상 외로 날씨가 좋지 않아 다시 세비야로 돌아가는 버스를 일찍 잡아타려고 했지만 열심히 찾아간 터미널에서 버스를 눈 앞에서 놓쳐버렸고, 론다에서 만난 한국인과 동지가 되어 남은 시간동안 좀 더 론다를 함께 둘러보기로 했다. 4개월동안 여행을 계획해서 하고 있는 간호사라는 그녀는 한달째 여행중이라고 했다. 각기 지금 하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오랜만의 대화같은 대화를 했다. 혼자 여행을 하는 것에 대한 편안함과 심심함, 그리고 어딜 가든 한 가지 종류의 음식만을 주문할 수 밖이 없는 아쉬움까지. 어쩔 수 없이 론다에 더 머무르게 되었지만, 구석구석 좁은 길을 다니며 우연히 만난 인연과 이미 아는 사람인양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새 론다에 있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이래서 어디서든 누군가와 함께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가.


론다의 거리


다시 돌아온 세비야에는 햇빛에 눈이 부시고, 이사벨 거리 맞은 편 쪽 강가에 해가 반짝이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론다에 잠시 다녀온 사이 세비야에도 비가 왔다고 했지만, 해가 세비야는 나에게 찬란한 태양의 도시로 기억될 거다. 내 피부에 남은 태양의 검은 흔적처럼.


플라멩코는 세비야에서 꼭 보고 싶은 것이었다. 플라멩코박물관에서 진행된 플라멩코는 남녀 무용수의 특색이 확연히 다른 춤이지만 강한 움직임과 애환이 담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무용수들의 몸짓과 기타 선율, 격정적인 기타 소리와 함께 울부짖는 듯한 노래 소리.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대극장 공연용이다보니 아무래도 정제된 느낌이었는데, 세비야에서 본 플라멩코는 날 것 그대로를 무대 위로 올려놓은 것 같았다. 물론 의상은 길에서 춤을 추는 플라멩코 댄서들보다 더 좀 더 갖추어 입었지만. 춤을 추는 댄서들의 표정이 그들의 움직임과 땀으로 한껏 슬픔을 뿜어내는 것 같아 순간 울컥하기도 했다. 아, 저리도 절박하구나. 난 언제가 되었든 저렇게 애타게 무언갈 원하던 적이 있던가, 저렇게 매달리고 소리치듯 표출한 적이 있던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눈이 질끈 감겼다. 무엇을 간절히 원해본 적도 없는 내가, 너무나 무감각했구나. 그 생각이 마음 한 켠을 찔렀다.


그들의 애절한 표정과 빠른 발의 움직임처럼 그렇게 화려하고 뜨거운, 세비야는 그런 곳이었다. 내 열망과 간절함에 대해 다시금 고민할 수 있는, 화르륵 불타올라 재가 되어 남을 그,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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