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t the musical, 잊지 말아야 할 것.
2016년 크리스마스 즈음, 아는 동생을 통해 런던에 뮤지컬 렌트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전석 매진이고, 짧게 공연을 한다는 것까지. 참 이상하면서도 당연한 건 구하기 어려우면 꼭 더 보고 싶기 마련이라는 거다. 공연은 2016년 12월 8일부터 2017년 1월 28일까지였고, 1월 12일, '뭐, 내 자리 하나 없겠나' 싶어져 호기로운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았다. St. James theatre가 있는 빅토리아역으로 가는 길엔 부슬부슬 비가 왔다.
리턴 티켓을 기다리기 위해 줄을 선 사람은 내 앞에 두 명 정도 있었다. 이 사람이 공연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선 건지 아닌지 좀 헛갈릴 정도로 서서 책을 읽는 데에 몰입하던 그녀에게 "Is it a queue for the return tickets?"이라 물었을 때 "Yes"라고 짧지만 확실히 말해준 덕에 그 줄이 맞는 것인지 확인했을 뿐.
공연 시작 10분 전쯤 티켓부스 쪽에서 사람이 왔다. 줄을 선 순서대로 티켓을 살 수 있었는데 좌석은 남아있었지만 가격이 저렴한 티켓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75파운드라는 꽤 큰 돈을 지불하고, 공연장에 들어가보니 이제까지 가봤던 전통적인 공연장이 아닌 현대적인 소극장 정도 규모의 작은 공연장이어서 런던에도 이런 극장이 있었구나, 싶으면서도 렌트 특유의 세트가 내 기억에 있던 그대로 내 앞에 있는 걸 보니 내심 반가워졌다.
자리를 찾아 앉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이 시작되었다. 눈에 띄는 엔젤 역할의 배우, 그리고 각기 제 자리에 서서 첫 곡을 부르는 그들의 계절도 겨울이었다. 'December 24th,'로 시작되는 마크의 노래를 시작으로 나는 뉴욕의 크리스마스로 소환되었다.
Christmas bells are ringing.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두 달동안 런던의 하늘을 밝히던 크리스마스 장식은 채 치워지지 않았고, 그래서인가 아직 내 몸은 크리스마스에 머물고 있는 듯 했다.
초를 불어 끄게 하고는 다시 불을 붙여달라고 하면서 꼬시는 미미나, 알면서도 넘어가는 로저. 그들의 목소리도 아름다웠지만 렌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누가 뭐래도 엔젤이지 않나. 그런데 이 배우가, 정말 너무 압도적으로 잘하는 거다. 춤이며 노래며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전 미국 오리지널 캐스트로 봤을 때도 엔젤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Today 4 U가 이렇게 역동적으로 들릴 줄이야. (알고 보니 그 배우, 웨스트엔드에서 빌리 엘리엇부터 시작한 데다가 마이클 잭슨을 오마주한 <This is it!>의 첫 번째 오리지널 캐스트였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콜린스가 엔젤에게 'Santa Fe' 노래를 부르는 순간, 내가 좀 감정적으로 이상하게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삼키지 못하고 내보내야 할 쌓인 감정같은 것이었다. 울컥하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1막이 끝날 때쯤 진정이 되어가는 내 상태는 2막의 시작 Seasons of Love에서 다시 또 물컹거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 곡에서 감동 안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 날은 이상하기도 참 이상했다.
There's only us
There's only this
Forget regret or life is yours to miss
No other road no other way
No day but today
뮤지컬 렌트에서의 가장 중심이 되는 메시지, 사랑과 지금. 나의 지금, 이 런던의 한 가운데에서 하루하루가 낭비되던 그 때 내 머릿 속에 울리던 목소리.
마지막까지 로저의 품에 안겨 엉엉 울던 미미 역의 배우가 연기로만은 저렇게 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부르던 그 노래가 그 날따라 왜 그렇게 절절하게 들렸는지 모른다. 커튼콜을 하는 배우들에게 박수를 치며 그 때까지도 눈물이 마르지 않던 나는 공연이 끝나고 불이 켜지는 순간 도망치듯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빗줄기가 공연장에 들어갈 때보다 더 거세져있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가는 길도 전부 다 젖어있었다. 첨벙거리며 발길을 재촉하던 나는 무엇을 피해서 그리도 잰 걸음으로 걸었던 걸까. 73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머리 속이 복잡했다. 나는 하루를 쉬이 살면서 무엇을 매일 잃어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잊지 않고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와 있는 걸까.
1년을 525,600분으로 세기보다 행복과 사랑의 순간으로 기억하며 함께 하는 사람과 웃음의 기억으로 살다보면 오늘이 내일보다도 더 값질 수 있을까. 이 런던의 비오는 겨울이, 언제까지나 내가 서 있는 곳일 수만은 없기에, 이 순간이 저릿하게 아쉬워지는 지금이었다.
완벽히 해석되지 않는 언어로 된 노래가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아득히 멀리 들리지만 이 소리들이 더 분명해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 시간이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더 막막한 것일지도 몰랐다. 과거의 그 언젠가 나는 지금과 같은 고민을 했고, 지금의 나도 달라진 그 자리에 다시 서있었다. 붉은 빛을 반사한 그 길이, 내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어느새 해가 바뀌어 있다. 내가 런던에 있을 수 있는 시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잊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난 왜 또 안일해져 있을까. 내일 다시 찾아올 '오늘'은 이 곳이 아닌 또 다른 어딘가에서 나를 맞이할 거다. 길을 잃어도 그 위에서, 내일은 또 다시 오늘이 될 테니.